“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진정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우리의 정의와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모시는 착한 양인가?
세상의 정의 평화 투사를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생각지는 않는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쫓지 않고 나의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실 양들의 인도자들이어야 할 수도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저희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지 않고 정치가들을 열렬히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길잃은 양들인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어머니 부대’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었고,
요즘은 ‘개 딸’이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둘의 공통점은 복음이나 보편성 같은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어떤 때 저희 일부 수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이 이러합니다.
주님의 정의를 가지고 여도 야도 모두 비판하고 예언해야 하는데
비판과 예언은커녕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를 따르는지 잘 식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 정의를 따르는지 세상 정의를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물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불의와는 갈라서야 하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화뇌동은 말고 화이부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종종 부화뇌동하거나 독불장군처럼 자기 정의만 주장하여
화이부동할 줄 모르고 주님처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양들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니까 성직자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가정의 부모나 단체의 장들은 가정과 각 단체에서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주님의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는 목자가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목자 의식입니다.
나도 목자라는 의식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이기도 하지만 양들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목자가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양들을 그저 잡아먹고 팔아먹고 부려 먹으려고만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먼저 들어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출 소녀가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그들을 꾀어 성 노리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그럴 수 없는 집안 사정이라면 그들을 내 집이나 다른 쉼터로 인도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착한 양들입니까?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대신 실현하는 선한 목자들입니까?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