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7월 22일 월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20,15)
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주님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되라
돌이 치워진 것을 맨 먼저 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천사들과 예수님까지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분께 말을 하고그분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분께서 니를 만지지 마라’(요한 20,17 참조) 하시면 멀찍이 떨어져 서십시오. ‘말씀’을 숭배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먼저 나타내신 이들을 아시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우리의 일어남과 깨어남의 결과는 무엇인가? 본 설교와 관련된 성서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모두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루카 7,16) : “아이의 부모는 넋을 잃었다’(루카 8,56). 두려움과 찬양과 놀람이야말로 깨어남의 열매, 곧 무감각한 의식에서 부활한 우리들의 열매다. 우리 존재의 뿌리에서 감사와 사은이 싹튼다. 하느님이 깃들어 있고, 하느님이 둥지를 틀고 있는 이 신성한 우주의 선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뿐이다. 우리는 존재와 생명과 창조계와 창조주에 압도된다. “그분은 이 모든 선물과 함께 자신까지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한다." 우리가 입 밖에 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도가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뿐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감사의 인사 외에 달리 하느님과 의사를 소통할 길이 없다고 해도,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기도야말로 모든 깨어남과 일어남의 목적, 깨어 있음의 목적, 곧 영성의 목적이다. 죽은 자까지도 생명을 선물로 받고서 찬양했다.(206)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7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갈라 4-6장 / 필리 1-4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필리 1,12-25
사도의 삶과 그리스도
형제 여러분, 나에게 닥친 일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온 경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지만, 어떤 이들은 선의로 그 일을 합니다.
선의로 하는 이들은 내가 복음을 수호하도록 정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기심이라는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할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 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