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로 시작되는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이의 비유라고 할 수 있는데 제 눈에는 씨 뿌리는 이가
뿌릴 데와 안 뿌릴 데 가리지 않고 아무 데나 마구 씨를 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라면 열매를 내지 못할 땅에는 씨를 뿌리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씨 뿌리는 이는 주님이니
주님께서는 저보다도 현명하지 못하신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씨를 아무 데나 마구 뿌리시니
현명하지 못하실 뿐 아니라 씨를 낭비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현명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이시고,
사랑을 낭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시는 겁니다.
친엄마와 계모를 비교하겠습니다.
주는 대로 밥을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어린애는 보통 까탈스럽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 받아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밥을 먹이기 위해 애를 먹는데 그럴 경우, 계모는
먹기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며 밥 먹이기 위해 그리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엄마는 그렇지 않지요.
어떻게든 먹이려고 하고 쫓아가 입에 넣어서라도 먹이려고 하지요.
안 먹으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으면 성장에 크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친엄마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 사랑이 낭비된다고 결코 생각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당신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에서 우리는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다른 한편 우리의 말씀 밭 상태에 대해서도 봐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 밭은 밭이라고 할 수 없는 길바닥이 아닌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돌밭이거나 가시덤불 밭은 아닌지.
어제 행진을 마치고 나눔 시간에 한 얘기이기도 한데
저는 이번 행진을 근심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래서 어제의 행진은 근심과 기도의 행진이었습니다.
비유에서 가시덤불 밭이란 근심으로 덮인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잘 성찰하고 식별해야 합니다.
나의 근심이 어떤 근심인지.
근심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쓸데없는 세상 근심이라면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라는 노래처럼
털어 버리고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쉽지 않지만.
그러나 어제 저의 근심은 그런 쓸데없는 세상 걱정 근심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생긴 문제를 어떻게 정상화할까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해야 할 근심 걱정이며 사실은 공동체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근심과 걱정은 털털 털어 버릴 것이 아니라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름하여 근심 기도입니다.
엄연히 있는 근심,
해야 할 근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근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주님, 이런 근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여쭙고 하느님의 답을 듣는 것, 이것이 근심 기도입니다.
그러면 근심도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