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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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그물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는 비유는 사람들이 행동의 원칙으로 삼는 것들이 저마다 더할 수 없이 다름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형태의 덕이나 악덕에 이끌리는 성향에서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들과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하늘 나라가 갖가지 짜임새로 엮은 큰 그물에 비유되는 까닭은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에 매우 다양한 사상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물은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파도는 세상 모든 곳에서 삶의 괴로운 일들 안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 그물이 가득 차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기대했던 그물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시는 분께서 완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물의 짜임새는 복음서와 사도틀을 통해 전해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좀 더 덧붙이자면,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이라는 표현은 모든 민족이 부름받은 사실, 곧 다른 민족의 부르심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9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아시오(루카 21,31),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우리 모두 그분을 따르게 되기를. 하느님을 아는 그 경지로 우리를 데려가시기를. 아멘.
주석: 하느님 나라의 때와 곳/야곱이 꾼 꿈의 뜻/하느님 나라는 복의 나라다 - 창조계야말로 그 복이다/우리는 모두 왕이다 - 우리가 그 사실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예수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아마도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일 것이다. 이것은 신학지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견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와 그것의 도래를 설교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메시지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는 엑카르트의 설교 역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의 설교들에서 살펴보고 다루었던 모든 주제. 곧 창조계의 선함, 안(ínness0의 실재성과 만유내재신론, 창조적인 말씀의 현존,모든 존재의 평등, 존재의 고귀함, 인간의 특별한 고귀함, 실현된 종말론,이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 - 이 모든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일 것이다. 엑카르트가 본 설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수의 성서 구절로 보건대, 우리는 그가 하느님 나라의 전통에 푹 잠겨 설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본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구절은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데, 거기에 언급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한다.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7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콜로1-4장/ 필레1장 / 1베드1-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고통의 도가니
프란치스코는 감기에 걸렸는데 드디어 성한 기관지 폐렴이 되었다. 그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갖고 평화중에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듯했다. 처음 두 주간은 병상에서 전혀 일어날 수가 없었고 고열에 신음하면서도 로사리오 기도를 잊지 않고 드렸으나 완전히 쇠약해진 뒤에는 한 단의 로사리오 기도도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소년은 퍽이나 한심해하며 힘없이 그 괴로움을 어머니께 호소했다. 어머니 올린삐아는 아이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많이 아플 때는 마음의 기도만으로도 성모님은 흐뭇해 하신다고 타일러 주었다.
소년은 어머니께 성모 마리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로사리오의 각단마다 하도록 부탁하였다.
병세가 나아져 조금 거동하게 되었을 때에도 몸이 너무 쇠약해서 방에만 있어야 했다. 이 지방에는 겨울에도 가끔 좋은 날씨가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프란치스코도 힘이 좀 나서 산책하였고 그의 발은 자연스럽게 고바 다 이리아 쪽으로 향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원기를 북돋우려고 병은 곧 나을 것이라고 친절히 말했다. 그러면 소년은 항상, “고마와요. 그러나 제 병은 낫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였는데 그 말 속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과 어딘지 모르게 천국을 동경하고 있는 듯한 불가사의한 기품이 감돌고 있어서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대모가 성모님께 병의 완쾌를 빌기 위해 좋은 봉헌물을 바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소년은 그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일은 아무 소용 없어요. 난 회복의 은혜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2월 말경 그는 다시 병석에 누웠다. 히야친타는 오빠 곁에 앉아셔 오랫 동안 위로도 하고 말벗이 되어 주면서 지냈다.
자주 프란치스코에게 병문안 갔던 루치아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소년은 영웅적인 용기로 고통을 견디었고 탄식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주는 것은 무엇이고 다 잘 받아 먹었으므로 약이나 음료수 중에 어떤 것을 싫어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날 루치아가,
‘프란치스꼬, 몹시 괴롭니?" 하고 묻자,
“응, 퍽 괴로워! 그러나 난 이 모든 것을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참는다"
하고 대답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그 고행 밧줄을 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것을 풀어 아무도 모르게 루치아에게 건네 주었다.
“우리 엄마가 보지 않게 치워 줘. 이제 난 그것을 매고 있을 수가 없어."(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