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는 뽑힌 증인들 앞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어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보여주셨나이다.”
오늘 감사송인데 뽑힌 증인들 앞에서 십자가 죽음을 대비하여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음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을 증인으로 뽑힌 우리로 정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앞두고,
그러니까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신적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신 것인데 여기에 의도가 있습니다.
변모의 의도는 간단명료합니다.
당신이 돌아가셔도 절망하지 말라는 것이요 희망을 보라는 것이요,
가장 참혹한 순간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눈앞이 캄캄하다. 앞이 캄캄하다.
이처럼 현재의 암울함이 눈을 멀게 하고 미래를 캄캄하게 하기 마련인데
이때 암울한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미래의 눈, 희망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암울한 현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고 현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미래의 눈과 희망의 눈은 현재의 암울함은 직시하고 인정한 다음,
그 다음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죽었는데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들은 훨훨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하늘나라의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제자들이 당신 죽음을 보고 부활을 내다보라고
당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왜 세 제자에게만입니까?
왜 세 제자에게만 보여주십니까?
그 의도와 이유도 분명합니다.
희망의 증인이 되라는 겁니다.
어느 공동체건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미래 희망을 볼 줄 알면 증인이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증인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는 미래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현재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우리 가정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누가 우리 공동체의 희망의 증인입니까?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는 암울하지 않다고요?
현재에 감사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현재 암울하다고요?
그리스도인인 내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희망의 증인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