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늘 들은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마르코복음은 오늘의 말씀을
'엿새 뒤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뒤'라는 단어는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오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
엿새 뒤에 변모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야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나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 출발점으로 볼 수 있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그 뒤에'라는 시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변모 사건까지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묶어 놓았습니다.
일주일은 우리에게
창조 이야기로 익숙한 시간입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즉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그 사실을 적용하자면
수난과 부활의 예고는
변모 사건에서 완성됩니다.
말로써 전해주신 것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부활은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수난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활이 가능한 일인가는
평소에 생각하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를 보았어도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이야기,
수난과 부활 예고와
오늘의 변모 이야기에 똑같이
'다시 살아난다'는 표현이 있는데
비록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신 다음에도
한 동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부활은 정말 이루어질 것임을
변모 사건으로 몸소 증명하십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믿지 못하더라도
정말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미래에 언젠가 변모 사건을 떠올린다면
그때에는 온전히 이해하고
온전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가능한 일임을
우리가 꿈꿀 수 있도록 미리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희망할 수 있게
용기를 주십니다.
변모는 당신의 화려함을 자랑하시는 것도
인간과 당신이 다름을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를 앞서 이루시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좌절하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희망의 끈을 잡고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