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어제 복음은 백 마리 양 가운데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름으로써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라고 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둘이 타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알려서 고쳐주라 하십니다.
어제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한 마리를 찾으라고 하심과 같이
한 사람을 구하는 데 온 공동체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의 누나들 모두를 혼내셨답니다.
특히 동생이 잘못했을 때 애꿎게 언니들이 같이 혼났는데 그것은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의 잘못을 막지 않은 것 때문이었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만 그러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자녀를 교육했지요.
예를 들어 동생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데
그것을 본 형이 그런 동생을 놔두고 저 혼자 돌아왔다면
그 얘기를 들은 어느 부모가 그런 놈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도 그런 놈은 무지막지하게 혼쭐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모르는 체할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만약 모르는 체한다면
그것은 무관심하기에 어떻게 되든 관심 없거나
미움, 질투, 시기 등으로 형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사랑하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입니다.
육체적이나 경제적으로 형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러니까
형제가 병들거나 부도가 나서 쫄딱 망하게 되었을 경우는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
죄를 지을 경우,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연민을 가지기보다는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사실 육신이 병든 것보다 영혼이 병든 것이 더 불쌍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인 죄를 육신의 병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고쳐주려고 해야 하고 어떻게든 그러니까 혼자 안 되면
둘이서, 둘이서도 안 되면 공동체적으로 고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
죄도 병입니다.
아니 죄가 더 안타까운 병이고,
죄야말로 신자인 우리가 더 고쳐줘야 할 병입니다.
나한테 죄지은 것이 영혼의 병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그의 죄 때문에 같이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