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우선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의 죄가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시는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둘이 만나 해결될 수 있다면
그 사실은 다른 사람은 모르고
그렇게 조용히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함께 듣습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을 더 데리고 와서 그것을 말해도
자기들끼리 편을 만들어
자신을 공격한다고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더 데리고 가는 그 사람은
나와 가까운 사람보다는
그와 가까운 사람,
또는 나와도 그와도 가깝지 않은 사람이어야
더 좋습니다.
여기에서 이 방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상대와 가까운 사람을 내 증인으로 세우는 것은
마음적으로도 부담이 되는 일로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정말 상대방을 위한 마음이
큰 경우입니다.
그가 마음을 바꾸는 것이
나에게 중요하기에
다시 말해 그가 바뀌기를 희망하기에
나의 노력을 쏟는 것입니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방법으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다른 민족 사람이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율법의 정신에서 다른 민족 사람은
하느님과도 관계가 없는 사람을 말하며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그를 죽여도 그것은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심하게는 없는 사람처럼 대하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은
그 자체를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한 큰 고통을 겪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마음에
무리수를 두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잘못을 말하는 것은 지적으로 느껴지며
내가 판단 받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은
하나같이 잘못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감춰주고 싶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부담이 되고
어려움이 따라오더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은
무리수를 두더라도
잘못을 덮고 지나가기보다는
이야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상대방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도
그것을 심판하는 마음으로 말하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그가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옳고 그름을 말하는 자리이기에
상대방의 잘못을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고
그래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서로 받아들여야 할 사실입니다.
세상은 점점 상대방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잘못을 이야기하더라도
타이르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지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는 점점 깨지고
서로 상처는 더 깊어집니다.
사랑의 타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