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복음에서 부자가 주님 추종에 실패하자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답하시는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지금 가난한가?’ 성찰케 되었습니다.
저의 가난에 대해 성찰할 때 지금은 많이 무디어졌지만
옛날에는 집착 수준이었다고 할 정도로 무척 가난하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은 물질의 가난보다 아버지가 없는 가난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기가 꺾인, 아니, 기가 아예 죽은 가난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안 계시니 물질적으로도 가난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하루 세 끼를 먹은 것이 드물 정도로 늘 배가 고팠고,
시내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 와 밥을 먹을 때 슬쩍 나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돈이 없어 등록금을 못 내는 것은 물론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을 사 가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손바닥 열대를 맞고 때우는 서러운 가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의 서러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를 대신 부잣집 딸
미술 선생님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지금도 그 선생님 이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들어와 프란치스칸 가난을 배운 다음에는
한편으로는 너무 행복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가난을 제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가난은 내몰린 가난이었다면 이때의 가난은 제가 선택한 가난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보물을 나만 소유한 듯 제가 오히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저는 가난에 너무도 집착했고 가난치 않은 사람을 무시하였으며,
저의 형제들에게는 왜 가난하지 않냐고 질책하고 더 가난해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 괴로워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로 인해 괴로웠고 관계는 최악이 되어 괴로웠습니다.
그러다가 가난에 대한 집착과 영적인 교만이 그 원인임을 깨닫고
수련에 들어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난이 아니고 사랑임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이후 저의 가난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가난이었으며
그래서 수련 마치고 올라오자마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고,
그것은 선교 열망과 결합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의 가난 여정을 정리하면
내몰린 가난,
선택한 가난,
집착과 교만의 가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저의 가난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떤 것이 될까요?
제 생각에 순례자와 나그네의 가난이 되어야 하고 그런 가난이 될 것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라 하느님 나라로 가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도 순례자와 나그네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이제 하나하나 다 내려놓아야 하고
내가 스스로 내려놓지 않아도 잃게 되고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건강부터 잃게 되고,
욕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그만 집착이나 애착도
하나하나 내려놓게 되고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순례자와 나그네의 이 가난이
우리가 마지못해 선택하는 가난이 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로 가는 즐거운 길에 기꺼이 선택하는 가난이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