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세째 날: 슬픔이 영적지혜가 되도록 돕기
하루 중에 무언가가 일어나서 당신이 슬프거나 부정적이 되거나 낙담하게 될 때, 당신이 슬픔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탐색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당신의 겪은 것에서 배울 수 있고 어디에서 당신이 취약했는지 발견할 수 있고 또한 당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첨언) 누군가는 사진을 찍을 때, 자기가 찍고 싶은 대로 찍는 것이 아니라, 찍히는 대상이 자기를 이길 때에,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이긴다고 해서 경쟁하여 이긴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을 수 있을 때를 담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여기에는 찍는 이의 마음과 프레임이 있지만 그 마음과 프레임이 찍히는 이를 가두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하고 일치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떠한가요?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이 작용해주시기만을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느님이 내가 생각하는 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불안만이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이런 착각을 깨트릴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우리의 슬픔과 역경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세상과 관계가 내가 원하는 식으로 되지 않는 순간이고 세상과 관계가 있는 그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그 집착의 허무함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너인 이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하 형제들이 순종하지 않아 힘들어서 봉사자직을 내려놓기를 원하는 봉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가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이든, 또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든, 이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는 이런 것들을 원하고, 다른 것은 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그대가 따라야 할 주 하느님의 참된 순종이요. 나의 참된 순종이 됩니다.”
하느님의 순종? 하느님도 무엇에 순종하시는 분이신가? 어떻게?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순종하시는 분으로 다가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순종을 따르는 우리는, 이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나’(1인칭)를 강요하지 않고 그(3인칭)를 만나며 그가 너가(2인칭) 되도록 하며, 순종하시는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사라센인들과 비신자들에게 가운데로 가는 형제들에게도 비슷한 길로 안내하며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가 되도록 한다. “한 가지 방법은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 아랫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말다툼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만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자세는 지금 기후 위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피조물이 인간의 이용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형제 자매로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연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길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우리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일어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