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과 비교하여 관상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는 요즘입니다.
기도하면서 좀 더 차원 높은 기도를 하고 싶은 갈망 또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관상이란 근본적으로 보는 것,
다시 말해서 직관 또는 지복직관의 문제이기에
관상을 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요
반대로 관상을 잘하고 있다면 그것은 눈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그만큼 눈이 멀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눈이 멀어서 불행하다고,
눈이 멀어서 하느님 관상을 못하기에 불행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눈이 멀고 어떻게 하다가 눈이 멀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욕심 때문입니다.
흔히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할 때의 그것입니다.
무엇에 욕심이 있어서 욕심을 부리면 우리는 그것에 잡착하게 되고,
이 집착이 그것 만 보고 그것 밖의 다른 것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돈 욕심이 있고 돈에 집착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돈뿐이고
돈 외에는 다시 말해서 돈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못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 눈에는 돈만 있고 돈 밖의 다른 것은 그 어느 것도,
하느님도 인간도 다른 피조물도 없고 심지어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욕심이 집착하는 무엇에 가려 눈이 멀지 않았는데도 못보는 눈멂이라면
교만은 이것보다 심각한 그야말로 진짜로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눈멂입니다.
그러기에 교만으로 인해 눈먼 사람이 욕심으로 인해 눈먼 사람보다
볼 수 있게 되기가 더 어려운 것은 자명합니다.
욕심 눈멂은 욕심내는 것을 버리기만 하면 되지만
교만 눈멂은 바로 자기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 수술로 치면
욕심 눈멂은 백내장 수술 정도라면
교만 눈멂은 개안 수술 정도이지요.
교만은 지독한 자기중심이요 자기 집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눈에 돈밖에 없는 것이라면 교만은 자기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돈을 버리는 것이 쉽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것이 쉽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눈멂은
두 가지 다이고 그래서 돈 욕심만 있는 보통 사람보다 더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느님 관상에 앞서 나-관상, 자기-관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욕심내고 무엇에 집착하는지,
나의 교만은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보는 나-관상을 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