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동을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그들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과연 그것이 잘못인지 모르고
그렇게 하는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이 십일조는 내면서
율법의 정신은 무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율법은 생명과 직접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지키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자신들의 법을 지키는 것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한 층 더 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려움은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인가입니다.
말로 정해진 율법은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해석이란
그 율법의 말을 삶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구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되면 안 되기 때문에
권위 있는 사람들
즉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몫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예수님께 꾸중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 규정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정해진 순간
답답한 마음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규정을 잘못 지켜서
생명을 잃을 염려도 없어졌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을
주일 미사에 다녀왔느냐로 해석하다보니
주일에 미사만 다녀오고 나면
적어도 이 규정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타나는 현상은
율법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해석은
규정을 잘못 지키는 것에서 오는 위험성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그 정신을 지킨다는 본질에서도
벗어나게 했습니다.
즉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동은
이 규정을 왜 지키는지 생각하면서
이 규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그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결과입니다.
매번 그 의미를 따지면서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가끔씩이라도 한두 가지 정도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우리가 문자에 갇혀서
정신과 상관 없이 살게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