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떨어져 울게 하는 인간의 자만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당신을 기꺼이 바치신 것은 온갖 나약하고 모자라는 것들을 받아들이신 그분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숨겨진 자비를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을 통하여 발견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지금 여기서 누리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신성한 형제가 되기를 원하셨고 당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모두가 속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창세 이전에 우리를 뽑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에페 1,4)
하느님이 당신의 피조물과 맺으시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이러한 관계를 하느님과 인간과 맺으시는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이러한 계약을 맺으신다면 인간끼리의 관계도 하느님께서 당신을 내어주는 방식을 배워 상호 간에 내어주는 사랑으로 선이 흐르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선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고린 1,30)
예수님께서는 모든 때와 모든 장소에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함께 계심에서 혼자 떨어져 있게 하는 인간의 자만심이 외로움과 우울하게 만들고 자기중심적인 배타적인 관계를 만듭니다. 이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죄의 현상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하느님이 여기 또는 저기에 있다는 관념을 모두 초월하는 신성한 현존의 실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나 딸의 자격을 스스로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현존에 눈을 뜨고 우주적 신비를 눈치채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노력이나 업적과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으리라는 집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저지르는 악습과 죄의 현장에는 자만심의 감옥 속에서 반복적으로 업적과 공로를 쌓는 숙제를 하기 위해 귀한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인간도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타고난 존엄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창조된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신성한 지문이 찍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타고난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파를 넘어 똑같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DNA는 동일한 것입니다. 세계 안에 있는 여러 종교의 현상을 보면 만물을 지으신 한 분 하느님,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과응보의 틀에 갇힌 인간의 과도한 탐욕과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입니다. 창조된 만물에서는 창조주가 하나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