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르게 탈렌트를 나누어 줍니다.
결과에 가서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와
두 탈렌트를 받은 이가
똑같은 말을 듣는 것을 보면
능력이 많고 적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자의 능력 안에서
그 만큼의 결실을 맺는 것이
즉 다섯에서 다섯을
둘에서 둘을 맺는 것이
중요하게 보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는
주인의 말입니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들은 종으로서 할 일을 다한 것이지만
성실함의 결과는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습은
종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아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즉 성실함은 피조물인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유한함의 차이는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그것이 종류이던 크기이던
그 탈렌트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능력만큼
충실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충실함을 위해서
나를 잘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섯 개를 가졌는지
두 개를 가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두 개 가진 사람이 세 개를 버는 것을
하느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즉 우리 각자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대 평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또한
자신을 과소 평가 하지 않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가진 사람은
자신을 과소 평가한 나머지
나는 해도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영향을 주었지만
주인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를 게으르다고 말합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보면
주인은 그에게 다섯 개도,
두 개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가 한 탈렌트를 더 벌지 못했어도
그것이 문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소 평가한 나머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를 성실한 다른 종들과 비교해서
게으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시도한다는 것,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니 더 나아가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나의 한계도 경험하고
완급 조절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도, 그 시작은
성실함의 결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이 많고 적음을
스스로 판단하기에 앞서
시작해 볼 수 있는 용기를 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