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국의 사다리 (12세기)
작가 : 이집트 시나이산의 수도자
소재지 : 이집트 시나이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영적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현대는 너무도 혼란스럽고 갈등 요인이 증폭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달라지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지 대해 회의하게 된다.
그냥 습관적인 반복으로 만족하는 시람이라면 모를 일이로되 현대 세계의 변화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오늘날은 참으로 신앙인들에게 많은 혼란과 불안까지도 안겨주고 있다.신앙의 내용보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유튜브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신앙을 소개하는 것이 너무도 다양하나 “장마에 마실 물 찾기 힘든다는 격언처럼” 신앙에 대한 것은 겉은 번드레하지만 속은 빈 그런 실속없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 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진지하게 신앙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교회 자체가 주는 실망으로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 만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이 주는 충격 역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만만찮다. 요즘 온 세계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해서 교황님도 염려하시는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를 깡그리 파괴하는 위험 앞에 우리를 노출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인공지능이 바쁜 우리의 일손을 덜어주는 좋은 도구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의 파괴요인으로 등장하면서, 인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더 나아가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우리들의 빰을 치는 괴물로 변질 되면서 우리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어느 종교이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종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고 더 이상 종교적인 가치가 지성인들이나 생각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소위 열심하다는 종교인들이 보이는 추태에 가까운 위선적이고 무지한 삶의 태도 등 종교생활은 향기 없는 조화처럼 매력 없는 것으로 변질되고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태도는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이제 종교를 떠나지는 않더라도 떠나지 않기 위해선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시나이 산에는 서기 400년 경 부터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픈 수도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공동체를 만들었고, 517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노는 이곳에 수도원을 건축해서 오늘 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건조한 사막 기후의 영향으로 모든 게 보존 상태가 좋아 이 수도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성서나 희귀 사본은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이 수도원은 그 후 호전적인 무슬림 교도들이 둘러쌓고 있는 가운데서 갖은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어 크리스찬 수도생활을 이어온 장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이들은 성서에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교훈을 삶으로 살아가면서 영적 삶의 전통을 키웠는데 그중 하나가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꿈 이야기에서 영적 삶의 지혜를 찾아낸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오르는 영적 상승의 길이라는 것을 야곱의 사다리의 내용을 바탕삼아 영적 삶의 지혜를 축적하는 것으로 집약했다.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위인이었다. 형인 에사우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자 그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형 에사오의 엄청난 보복이 따르게 되고 야곱은 이런 보복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기약 없는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의 고통을 스스로 자초했으나 그는 약삭 빠른 심성 못지않게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면서도 뚝심 있는 믿음도 있었기에 그의 방황은 하느님을 찾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이런 그에게 하느님은 특별한 안배를 하셨는데 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창세 28,11-13)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면서, 두려움에 싸여 말하였다. “아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창세 28,16-17)
영적인 상승은 바로 야곱처럼 하느님 만을 바라보며 외골수의 마음과 자세로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이 수도자들이 항구하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 기도의 전통으로 정착되면서 이 수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마음을 전화시키고 열렬하게 하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영적 삶의 가장 확실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의식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런 영적 수행의 여정을 그린 것이다. 먼저 위를 향하는 긴 사다리가 있으며 그 위에는 성인들과 천사들이 갖은 어려움 속에서 유혹을 극복하고 위를 오르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위를 향해 오르고 있는데, 양쪽 밑과 위에서 이들의 순례 여정을 격려하는 성인들의 무리가 도열해 있다. 이들은 영적 여정을 시작한 이 사람들이 어렵더라도 참아서 모두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오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우리도 영적인 삶의 향상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많은 성인 성녀들이 우리를 격려하며 기도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영적 삶의 활기가 생기게 된다.
헌데 이런 응원단과 함께 아래 쪽엔 이들을 유혹해서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떨어뜨리려는 악마들이 군상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있으며 몇 사람은 이 마귀들이 쏜 유혹의 화살에 맞아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양상이 있다.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성인들의 무리는 아래 위 어디서나 순례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악마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이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시작할 때 의식해야 할 중요한 현실이다. 수도자들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끝기도의 순간 다음과 같은 성경을 보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여러분의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1베드 5,8-9)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유혹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들은 마치 이 작품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보살피는 성인들은 거리를 두고 있으나 우리의 인생 전체를 나락에 떨어뜨리려는 악마는 아주 우리 가까이에서 심지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가도록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을 반복하는 예수 기도는 우리의 묵주 기도의 기원처럼 너무 단순하면서도 깊은 항심의 신앙을 담고 있기에 오늘처럼 복잡한 세상 살이에서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좋은 기도가 될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미래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일리는 있지만 그리 지혜로운 것은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영성적 삶의 향상을 향한 지혜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균형있게 살 수 있는 좋은 지혜가 될 수 있으며 현대 간은 혼란의 시기에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교수이자 소설가인 로버트슨 데이비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영적 삶의 향상을 위해 과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혜의 보화에 대해 좋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찾고 있는 만족스러운 미래는 사실은 과거 현인들이 터득했던 삶의 지혜 안에 들어 있음을 발견하고 노력할 때 우리의 현실은 더 생기있고 방향이 분명한 것으로 인류에게 삶의 방향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늘 여러 혼란속에서 영적인 바른 삶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하늘 여정의 안내 역할을 하는 나참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영성생활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힘써야 하는 지혜를 알리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루카 13,24)
삶을 고귀하게 만드는 영성생활의 길은 고귀한 만큼 쉽지 않는 길이나 과거 여러 성인들의 삶이나 성서 말씀을 통해 그 길이 명확히 드러나 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영적인 삶의 지혜를 너무도 명쾌히 그러면서도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을 향하는 길은 획일적인 길은 아니지만 목표가 너무도 명쾌히 제시되었으니 예수님을 바로 보며 항구하고 굳굳히 이 작품에서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돌아가는 해바라기의 삶을 사는 것이 유일하면서도 정확한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히브 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