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질책성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벌어서 부자가 된 양 우쭐거리고 자랑하는 신자들을 질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들 자신은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라고 하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신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며 타이르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우리 부모들이 자신은 못 먹고 못 쓰며 자식을 서울로 보냈는데
자식들은 그 돈으로 마치 부잣집 자식처럼 행세한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아무튼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이는 신자들이 세속적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영적으로 겸손해지게 하기 위함이지요.
아버지의 진정한 역할은 그저 자식들 배부르게 하고 학교에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식이 자기 인생을 겸허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인생 길잡이 하는 거지요.
그리고 세속 아버지가 자녀의 참 행복을 위해 이러해야 한다면
영적인 아버지는 더더욱 그래야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코린토 신자와 달리 영적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바오로 사도와 같은 영적인 아버지가 이 땅에서 필요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아버지를 필요로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야말로 영적으로 교만하기에 영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컸고 그것이
어렸을 때는 작지 않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곧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저는 늘 아버지를 대신할 ‘제 안의 아버지’를 두고 살았습니다.
제가 저도 되고 제가 저의 아버지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아니면
아버지의 교만 유전자가 제게도 있기 때문인지
저는 인간적으로 교만하고 영적으로는 더 교만합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필요한데 문제는 제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저는 여러 사람의 영적 동반이라는 것을 해주면서
영적 아버지 소리를 듣는데 저는 누구의 영적 동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여러 말 가운데서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 유독 제 마음에 와닿았고 마음을 찌르는데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는 저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영적 아버지가 필요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