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언젠가 한 번 찾아오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성모님도 그렇고, 같이 온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도
당연히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기쁘게 맞아들이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만나러 나오시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혈연 관계의 가족과 영적 관계의 가족을
구분하는 것처럼,
아니 그것을 넘어 이 두 가족이 대립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과 요한이 가족이 된 것은
그래서 예수님의 혈연 관계의 가족과
영적 관계의 가족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는 순간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이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이라는 점입니다.
공생활의 어느 한 시점도 아니고
부활 이후도 아닌
죽음의 시간에 그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일치는 예수님의 유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삶 안에서 우리는 서로 갈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에 각자의 모습이 두드러지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열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진정한 일치가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내 방식대로의 일치를
서로 상대방에게 강요합니다.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 방식을 강요하면서
우리는 지금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서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이러한 일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깨지고 맙니다.
진정한 일치는 정말 있는지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의 형식으로
일치를 이루어주신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일치를 향해 조금씩, 천천히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