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언하는 책이고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벌어질지 묘사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오늘 복음은 이런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표시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인데 아주 짧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 의미가 매우 풍부하고 깊습니다.
우선 오늘 치유 받은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라는 점입니다.
무릇 말 더듬는 이는 혀가 짧아서 더듬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말을 하지 못함은 성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줍은 성격이기에 못하거나
신학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들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른 귀는 열려서 그 말은 듣지만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다른 귀는 열리고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말의 홍수란 말이 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거기에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듯
말의 홍수가 나도 그 말들에 의해 우리가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말들이 많습니까?
방송으로 치면 갖가지 티브이 방송이 있고,
자기 손안의 방송인 스마트 폰 시대에 온갖 유튜브 방송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홍수와 방송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듣고 골라서 듣습니까? 아니면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립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화방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만화를 못 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엿장수가 앞뒤 뜯어진 만화를 가지고 왔는데
저는 고물을 가지고 엿을 사 먹지 않고 그 만화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고 또 보고
그야말로 닳도록 보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제가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아실 겁니다.
말들을 끊지 않으면 그 수없는 말들에 의해 영적 감수성을 잃거나 무디어집니다.
이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귀에 이어폰을 달고 살다가 청력이 잃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데리고 온 사람들을 놔두고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아주 더러운 짓을 하십니다.
그의 귀에 당신 손을 대시고 그의 혀에 당신 침을 발라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듯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도 고쳐주실 수 있지만
따로 그러니까 은밀히 만나주시고,
한마디 말씀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행위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따로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데,
오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마음 무디지 않고 깨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귀에다 대고 ‘에파타’, 열려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가 열리겠습니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