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이 구리 뱀을 보면
죽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는 것은
그를 바라보면서 그를 믿는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
즉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육화에서부터 십자가 죽음
더 나아가 아버지 오른 편으로 들어올려지는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온 생애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그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시는 것은
'누구나'라는 표현으로
조건 없이, 그것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당신의 말씀을 증언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니코데모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받아들이다'는 표현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믿는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을 주시려는 하느님과
그것을 받으려는 인간이 만나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나약한 존재임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나약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도 바라봅니다.
그 나약함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나약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약함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