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모 통고(Mater Dolorosa : 19세기)
작가 : 미상
크기 : 캔버스 유채 98 x 52cm
소재지 : 튀르키예 이스탄불 드라페리스(Draperis) 수도원 성당
오늘날 이스탄불이라 일컫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이슬람 군주에게 함락 당하기 전까지 이곳은 동방 정교회의 도시였다.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오늘의 로마는 방대한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는 적당치 않다고 여겨 오늘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고 하기야 소피아라는 대성당을 지었는데, 오늘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 견줄 수 있는 대단한 건축이었으나 이것이 이슬람 교도들에 정복당하면서 튀르키아는 무슬림 종교의 나라로 변했다.
당시 여기에 있던 동방 정교회는 러시아로 옮겨졌고, 이스탄불에 남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금을 내면서 살았고 그후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그 후에 들어간 로마 가톨릭은 과거와 같은 교세는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자리를 유지하면서 지냈고 있는데, 이 성당 역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맡아 있던 성당이다.
무슬림 교도인 터키 술탄은 세금만 내면 다른 종교인들도 지낼 수 있도록 했으나 여기에서 지내기 위해선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신앙적인 이유로 순교를 각오하며 살아가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사목이나, 드물지만 튀르키아 본토인들을 위한 사목을 목표로 살아 왔다.
이 성당에는 근래에 와서는 아프리카 콩고 출신 회원들이 중심이 된 국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여러 크리스챤을 위한 작은 성당이나 기도소, 미사봉헌, 난민들을 돕기 위한 카리타스 활동, 더 나아가서 교도소 사목들을 하면서 특히 시리아 이락 등에서 피난 온 크리스챤 난민 신자들을 도우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 성당 제의실에 있는 작품으로 공교롭게도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님, 우리에게 익숙한 피에타(Pieta)라는 성모상과 나란히 예수님의 고통을 나눈 성모님으로 마주 보게 제작 되어 있다.
둘 다 예수님의 수난과 연관되는 작품이기에 이스탄불이 무슬림화 되면서 겪어야 했던 여러 고통을 담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면서도 더 애절함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크리스챤들은 오늘도 여러 제약된 환경에서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성당은 이스탄불의 ‘명동’과 같은 ‘탁심’이라는 도심 중심부에 있기에 많은 이슬람 교도들이 방문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처음 본 이 성당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는 뜻에서 보면 선교의 장으로서도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라틴어: Beata Maria Virgo Perdolens) 또는 통고의 성모, 슬픔에 잠긴 성모(라틴어: Mater Dolorosa)는 예수의 어머니 호칭들 가운데 하나이며, 성모님의 일생 중에 슬프거나 고통스러웠던 일들과 관련이 있는 호칭이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대중적인 신심의 표현 중 하나인데, 특히 성모 신심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신심의 하나이다.
가톨릭 교회는 민간 신앙의 차원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아들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킨 성모님에 대한 묵상에서 성모님이 겪으신 일곱 가지 고통을 생각할 수 있게 기도문을 만들어 배려하고 있는데, 이것을 성모님의 가슴 쪽에 칼 일곱개로 표시함으로서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신 성모님의 신앙적 차원을 강조했다.
이것은 물론 성서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이것을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 너무도 인간적인 표현임을 알리는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심으로서 인간 삶의 가치가 고양된 것처럼 성모님이 겪으신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만드는 것은 가톨릭 신앙이 지닌 인간적 표현의 너무도 심원한 공감대로 볼 수 있다.
성서에 바탕을 둔 성모 칠고의 각 사건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전에 봉헌되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성전을 찾은 아기 예수를 만난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루카 2,35)
2)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을 떠나신 일(마태 2,13)
3) 성가족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던 길에 아들 예수를 잃어버린 일(루카 2,48)
4)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난 성모님의 고통(루카 23,27)
5)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시고 숨을 거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 보야야 했던 어머니 성모님의 고통(요한 19,25)
6)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고통(요한 19,32)
7 ) 아들 예수를 무덤에 묻고 애통하신 고통(요한 19,40)
이 작품은 성모님의 고통 중 여섯 번 째인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내리신 예수님을 품에 안은 어머니 성모님의 고통을 그린 것이다.
형식으로 볼 때 이태리 작가의 작품으로 이태리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던 카라바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과거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도 어떤 화공이 순례하다 절에 기식하고 도움을 받고 떠나면서 보은의 마음으로 불화(彿畵)를 남긴 것과 비슷한 차원에서 남긴 작품이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선교하던 선교사가 이태리를 방문해서 만난 화가에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성당을 위해 봉헌해주길 부탁해서 그린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무슬림의 영토인 이스탄불 성당에 있는 작품으로 너무 성격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먼저 십자가에 내려져 성모님의 품에 안긴 예수님 곁에 천사가 무릎을 꿇고 애도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것은 이때 사도 요한과 몇 명의 부인들이 함께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피에타를 제작할 때엔 항상 성 모자 만을 등장시키는 것은 성모님의 고통이라는 핵심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기법으로 정착되어 있다.
성모님은 이 지극한 고통과 고독의 순간에 어떤 인간적인 위로도 받을 수 없이 천사로 대표되는 하느님의 위로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인데, 우리도 어떤 때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어디 의지할데가 없다는 지독한 절망감에 빠질 수 있으나 이 순간 하느님의 천사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키며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나의 고통은 내 혼자의 고독이 아니라 성모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란 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감당할 수 없이 어려운 순간에 성당에 뛰어가서 이 고통의 성모상 앞에 기도하면서 자기의 고통이 자기 만의 것이 아니란 위안과 용기를 얻게 된다.
성모님 앞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죽음을 겪은 모습이시기에 수의인 흰옷을 걸치고 장례식 형상인 흰 천 위에 계신다. 이처럼 흰색은 예수님의 순수한 영혼과 죽은 상태라는 수의의 상징이다. 예수님이 오른 팔을 비스틈히 걸치고 계신 곳의 붉은 천은 그 분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조건을 지니신 분으로서 극심한 고통을 받으셨다는 상징의 표현이다.
십자가의 형벌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 제국의 시민에게는 과히지 않을 만큼 지독한 치욕과 고통의 형벌이었다. 그래서 식민지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실시했으며, 로마 제국 시민이라면 정치적 혁명을 시도했던 극악 무도한 죄수에게만 가하던 형벌이었는데,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표지로 사용하던 형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지독한 고통을 겪으시고 숨을 거두신 모습 치고는 너무도 안온한 모습이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 27,4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카 25,4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위의 성서 말씀처럼 예수님은 극도의 처참한 모습의 고통으로 인생을 마무리 하셨으나 이것은 인류 구원이라는 대업을 이루신 것 이기에 승리의 표징도 되는 실패와 성공, 고통과 영광이라는 양면성의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이 자신의 왼손을 어머니 성모님의 손에 맡기고 자신이 겪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어머니와 나누고 계신다. 어머니 성모님의 손엔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옮겨지고 있다.이 피는 바로 어머니의 가슴으로 향하면서 일곱 개의 화살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성모님의 표정 역시 너무도 안온하시다. 아들의 고통을 체험해서 너무도 슬프고 비통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고통에 동참을 통해 어머니로서의 지고한 사랑을 표현했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뛰어넘은 감회를 드러내고 계신다.
한 마디로 아들과 어머니로서 아들의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기 전 인간적 슬픔과 영광의 기쁨을 준비하기 전의 안온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애통하는 모자의 고통 상이 아니라 조용히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고 있는 모자의 모습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 부활 신앙을 믿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이어야 한다.
크리스챤은 고통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니고, 크리스챤이기에 오히려 일반 사람들이 받는 것보다 더 한 고통을 받을 수가 있다.
일반 사람들은 특별히 악한 짓을 하는 것은 그만두고 대강 대강 살다보면 다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이 크리스챤에게는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이 작품에서 보이는 성 모자를 생각하면서 포기니 도피의 유혹을 극복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이 고통의 순간에 이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예수님과 성모님도 겪고 있다는 것을 통해 감정이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을 통해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더 큰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출구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마치 사도 바오로가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가 일어서게 만드는 것이다.
무슬림 국가로 변한 튀르키예라는 현실에서 소수로 전락한 크리스챤들로 살아가면서 느껴야 하는 처지에서 신앙의 본질을 확인하고 희망을 주고 있는 좋은 소재의 작품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