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에 들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먹고 마시는 것은
좋게 보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먹보요 술꾼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은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먹지 않는 것도 불만이고
먹는 것도 불만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불만이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유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까닭 없이 불만인 것입니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너이기 때문에 불만입니다.
네가 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것을 판단하기에 앞서
불만부터 표현합니다.
까닭 없는 미움을 받는 것은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도 미움을 받고
저렇게 해도 미움을 받습니다.
미움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 상황이 쉽지는 않지만
그 상황을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도 불만, 저것도 불만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불만을 듣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상대방의 기분에
맞춰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시도해 볼 수 있을텐데
어떻게 해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오히려 그 시도를 멈추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의 입맛에 맞추기 보다
나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미움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보통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지만
때로는 까닭 없는 미움도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 없는 미움의 상황에서는
나의 방식을 바꾸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