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하느님 말씀은 등불과 같다
이 성경 말씀이 이야기하는 등불은 눈에 보이는 등불이 아니라 비유입니다. “등불을 켜서 그룻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등경 위에” 놓지요. 집안의 그릇들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나타냅니다. ‘들어오는 이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듣는 이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등경”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웁니다.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베스터만이 설명한 유대인 특유의 영혼관은 엑카르트가 강조한 영성 이해에 상응한다. 엑카르트는 영성을 영혼의 성장으로 본다. 우리는 이것을 앞의 두 설교에서 살펴본 바 있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는 “일치”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라서 하느님과 같이 되고,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창조주 하느님의 형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축복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모빙켈이 말한 대로, “축복이야말로 영혼의 능력, 씨족과 그 구성원 속에 살아 있는 능력이다. … 그것은 ‘야훼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능력이다.” 창조계의 일부로서 창조를 알고 있는 인간은 창조하고 축복할 책임이 있다. 복을 받은 자는 축복하게 마련이다. 축복이야말로 찬양이다. 창조계의 은총에 푹 잠기는 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복을 베푸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한 분이고, 영혼은 복을 받았다.” 영혼은 하느님을 빼닮았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느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의 능력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복이 적절한 이름일 것이다.(243)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9월 4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루카 22-24장 / 1코린 1-2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1코린 1,18-31
십자가의 복음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