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더욱이 그 일은 제자들이 먼저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 일로 놀라워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그 놀라움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 잘 일치하기 때문에
더 컸을 것입니다.
복음에서 좀 더 앞으로 가 보면
더러운 영 이야기에 앞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모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기적적인 능력도 보았지만
그들은 눈 앞에서 예수님의 화려한 모습도
이미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것이라는 확신을
점점 더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확신이 점점 커질수록
수난에 대한 예고는 이해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이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예 이번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시기에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과 연결되기 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화려함을 쫓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의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던 것이 메시아라면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만큼
메시아의 화려함도 더 크게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더 크신 계획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온 세상,
심지어 이스라엘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도
구원하시기 위해서
화려함의 방식이 아닌 수난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물론 인간의 머리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제자들과 달리
하느님께 그것을 물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하느님의 계획을 가지고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는 하느님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삶에서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
그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내 삶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그 하느님과 함께
삶의 어려움도 딛고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