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일 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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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3-55)
복음을 선포하고 거부당하는 경험을 통해 성숙하는 제자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진 은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온 세상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온갖 고을과 마을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악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몹시 분개할 때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신 것은 모두 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복된 소식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 오래 참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함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심부름꾼은 적대하는 자들에게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거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이 신적인 존재이고, 신적인 존재가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통일성과 겸손한 사람 안에서는 입맞춤이 일어납니다. 이는 소위 겸손이라는 덕이 신성의 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의 터에는 겸손이라는 덕이 심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하느님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나는 파리 대학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 안에서 완전해진다.” 이제 나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해를 입지도 않고 길을 잃지도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자신을 파괴할 무언가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뜨거운 숯불로부터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숯불은 나를 파괴하여 내게서 나의 존재를 앗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겸손한 사람도 자신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떠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납니다.(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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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제5주간 생태 회심 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2. 빙엔의 힐데가르트, 정홍규
영성과 생활의 통합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고갈되고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의 공동기반인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스스로 메말라 가는 것을 느낀다.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신앙과 생활이 다르게 별도로 움직인다. 전례, 의식에 참여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만 당장 눈앞의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만 채울 뿐, 일상생활에 당연한 부분들, 장을 보고 먹고 입고 일하는 것들은 영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또한 영성생활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사람들과 나누며 봉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나와 우리 생활에 바탕이 되는 자연과의 나눔
과 교류에는 마음을 쓰고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바쁜 시간들이다.
이렇게 해서 창조의 세계 지구는 더더욱 황폐해지고 자연과 분리된 인간의 의식에선 경이로움과 신비함이 사라지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과 영의 삶 또한 황폐해지고 이젠 곳곳에서 그동안 덮여 었던 이들의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환경과 영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눈으로 현대 학문들의 성과를 분석하면서 밝혀진 것은 결국 모든 문화에 담겨있는 지혜, 모든 영적인 전통의 중심에 담긴 깊은 통찰 안에 일치되는 내용, 곧 모든 것은 모
든 것과 상호 연결되는 관계에 놓여 있고 내재적인 것으로부터 초월적인 것으로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지양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웃과 창조의 세계와 이어져 있는 나의 삶 안에서 구원의 창조를 이어가는 깊은 영성을 느끼도록 찾아가야 한다. 몸과 영이, 우리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일깨우며 지내도록 해야 한다.
사랑의 원리로 이어지는 창조의 과정에서 시대를 보고, 모든 창조물의 질서 안에서 대우주인 우주와 소우주인 인간의 연관을 보았던 12세기의 힐데가르트는 정신만이 아니라 몸의 오관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심층생태학적인 영성을 일깨운다. 우리 자신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우리가 함께 하는 자연환경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 자신의 신체기관들을 살아있는 체계인 땅(지구)에 통합된 부분
으로 제험하며, 개인적인 자아의 한계를 “생태적인 자아’로 확대하도룩, 그리고 함께 하는 환경 안에서의 “연대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그런 의식에 머무르도록 이꿀어 주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
고있다.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며 이루는 관계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내적인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충전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일깨워준다. 지금까지 영성적인 줄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 부족했던 부분들을 영성적으로 다시 살도록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