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곧
자기가 전해준 복음과 다른 복음을 믿는 것에 대해 나무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당시 갈라티아 신자들 뿐 아니라
오늘 이곳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른 복음을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복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이고,
이웃사랑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제 얘기입니다.
비행기를 탔더니 제 좌석은 가운데 좌석이었습니다.
열세 시간 삼십 분을 가야 하는데 가운데 좌석이라니!
게다가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서양인으로 몸무게가 200kg이 넘는 거구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로 치면 1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
이런 사람이 제 이웃이라니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 쓰는 옆 친구와 가운데 금을 긋고는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넘어오면 싸우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 자리를 넘어오고 침범하는 그런 이웃인 셈입니다.
실제로 저는 양쪽 남자들 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는데
특히 그 거구의 넘치는 엉덩이 살과 허릿살이 제 좌석까지 쳐들어와
저의 살과 맞닿았고 그래서 저는 오는 내내 그의 열기로 인해 무척 더웠습니다.
그래서 이 이웃과 만난 나의 오늘은 불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30년 전 미국에 살 때 같이 살던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 형제도 200kg이 넘었던 형제이고 그래서 살을 빼기 위해 고생하던 형제였지요.
그 형제를 생각하며 제 옆의 친구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기 시작했습니다.
그 거구가 비즈니스석에 타지 못하고 제가 타는 좌석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저의 불운보다 그의 고통이 보이고 가엾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은 대체로 이런 사람입니다.
가까이 있기에 찌르고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아무리 찌르려고 해도 멀기에 찌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상처를 주려고 해도 주지 않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기준은 거리의 가깝고 멀고가 아니고,
나와 같은 동네 사람이거나 같은 족속이거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리나 관계 면에서 가깝든 멀든 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나를 괴롭게도 하지만 그도 괴로움 중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흔히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며
되돌려 받을 것을 알고 꾸어주는 것은,
세리들도 죄인들도 잘하는 사랑이라고,
그러므로 죄인에게나 의인에게 똑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야 당신이 가르치신 사랑이라고 주님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곧 사람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율법의 가르침이 복음이라며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무리가 갈라티아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다른 복음은 없고,
오늘 주님 말씀하신 ‘사랑 복음’밖에 없음을 확고히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오랫만에 강론글 너무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영육간에 더욱 강건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평화와 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