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민족 사람들과 이방인을 구분했습니다.
단순하게 다르게 생각한 것을 넘어
이방인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는 것은
그에게만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가 있는 하느님에게도
피해가 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은 다릅니다.
단지 그에게만 피해가 가지
하느님께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즉 하느님께 피해가 가느냐 아니냐로
죄가 되느냐 아니냐를 구분했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만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늘의 비유는
그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으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건 아니건
하느님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도 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조건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이미 그는 하느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율법에 따라서도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이를 나의 이웃으로 생각해서
모든 사람의 필요에 즉시 응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내 이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돌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돕고 싶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돕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모두를 내 이웃으로 생각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