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9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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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묻다
제 생각에, 예수님의 제자 하나가 기도하는 방법에 자신이 없을 만큼 스스로를 나약한 존재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배우고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회당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자란 사람이, 예수님께서 ‘특정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뵐 때까지 기도하는 법을 몰랐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제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기도해 왔지만 기도라는 주제에 관해 더 알아야겠다는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영적 전통들은 창조계의 복들을 송두리째 희생시킨 채 타락만을 강조한다. 창조-중심 신학자인 엑카르트라면 창조계를 거절하지도, 창조계에 죄의 꼬리표를 달지도 않았을 것이다. 타락을 강조하는 신학 위에 세워진 영성은 곧장 고행으로 뛰어들어, 사람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충동과 정서적인 활기를 억누를 것이다. 엑카르트는 그토록 극도로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열정을 억누르거나 통제의 거룩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의 긴장을 살아 낼 줄 알았던 인물이다. 그는 본 설교에서 두 편의 복음서 이야기를 택하여 영적 실천의 의미를 지닌 방법을 도출해 낸다. 첫째 이야기는 긍정의 길을 나타낸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재능을 개발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루카 복음(19,11-27)에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돈 관리 비유는, C.H. 다드가 지적한 대로, 마태오 복음(25,14-30)에 기록된 달란트 바유와 “시실상 같은 이야기”다. 창조계가 주는 선물을 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255)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10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루카 18-21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8절 신학과 대학
스콜라학과 그 대표자들:
초기 스콜라학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는 명민하였으나 균형이 잡히지 않은 베드로 아벨라르도(1079∼1142)였다. 그는 “그렇다와 아니다” 라는 변증법적 • 비판적인 방법으로 모든 깊이에 통달하려 하였다. 여기서 그는 가끔 신앙과 지식의 경계를 없앴고, 그래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아벨라르도의 명제 중 몇 개가 상스 교회회의(1141)에서 단죄되었다.
카말돌리회 수도자요 볼로냐의 학자였던 그라시아노(+1158)는 1140년경에 산재해 있던 교회법규들을 수집하고 구분하려 하였다. 후에 「그라시아노 법령집」으로 불리게 된 그의 <교회법 모순 조령의해유집>은, 1918년까지 표준적인 교회 법률서이던 「교회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여기에 중세기 동안 여러 개의 법령집이 추가되었다. 즉 그레고리오 9세의 「법령집」(l234), 보니파시오 8세의 「제육서」(l298), 「글레멘스 회헌」의 교령집인 이른바 「부록서」 등이다. 그라시아노는 “교회법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파리의 학자이고 후에 주교가 된 베드로 룸바르두스(+1160)는, 구분되고 총괄한 교의신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그의 「신학 명제집」은 전 중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학의 발전이 절대적 최고점에 도달한 것은 13세기의 이른바 “전성기 스콜라학”에 이르러서였다. 서구는 아라비아와 유대인 사상가들을 우회하여 - 동방의 아비첸누스(+1037), 스페인의 아베로에스(+1198), 유대인 마이모니데스(+1204),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22)를 종래보다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세계와 정신문제를 보는 그의 방식이 이교적인 내용에서 정화되고 그리스도교적으로 “세례”되어, 그리스도교의 신앙세계를 신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본보기로 받이들여졌다. 그의 개념 용어들은 주로 이에 적절한 것으로 생각되었다.(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