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갈라티아서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복음 선포에 있어서 역할 분담하게 된
과정을 전하면서 그것은 자기들이 역할 분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위임해 주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나는 할례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모범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초대교회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발전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에서는 이렇게 아름답고 위대한 모범을 전하면서
뒷부분에서는 그 반대의 모습도 있었음을 바오로는 전합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할례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봅니다.
하느님 앞에 있음과 사람들 앞에 있음.
하느님 앞에 있을 때는 당당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 있게 되자 눈치 보고 비위 맞추려 하고 심지어 두려워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으면 하느님만 보기에 눈치나 비위 맞추기는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으면 사람들 눈치 보지 않을 수 없고 비위 맞추지 않을 수 없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 앞에 있으면 첫째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눈치는 있어야지만 눈치를 봐서는 안 됩니다.
눈치가 있다는 것은 너의 필요를 읽는 눈이 내게 있는 것이며
일종의 사랑이랄까 감각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상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며
결코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두려움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치 보는 것은 비위 맞추기보다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비위 맞추기는 눈치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입맛에 맞추는 대응을 하는 것이며
그러다가 아첨도 아부도 아양도 하게 됩니다.
그제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갈라티아 신자들을 나무라며 이렇게 심한 말을 하지요.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 바오로가 비난하는 베드로는 더 초라한 모습을 보입니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나타나자 두려워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피합니다.
이것은 지난주일 독서의 기도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의 사목 지침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교황은 “목자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분별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말해 줌으로써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지침을 주면서
“목자가 바른말 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자기 침묵으로써 원수에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일갈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 교회의 반석이요 으뜸 사도인 베드로가 우리와 비슷하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며 바오로 사도에게 지적을 따끔하게 받는 겁니다.
주님은 안 보고 풍랑을 보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졌던 사도 베드로가
다시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음으로 두려움에 빠진 겁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러하니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더욱
주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 앞에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의식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