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8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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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는 제자들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습니다. 왜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을까요? 짐승들을 방주에 들일 때도 각기 정해진 수에 따라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교회의 성사로 정결하게 하여 암수 짝을 지어 들여보냈지요(창세 7,2 참조) .... 짐승들은 서로 적대하며 상대를 잡아먹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서라면 이리들을 겁낼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의 먹이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착한 목자의 이런 예지는 이리가 양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 줍니다(요한 10,12-15 참조). 그분께서는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이사 65,25)라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을 가장 깊이 답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신적인 심층도 어둡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운 실로 숨어 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 45,15). 하느님은 영혼의 터에 숨어 었다. 하느님의 터와 영혼의 터는 같은 터다. 이사야서의 이 부분이 말하는 하느님, 곧 숨어 있는 하느님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과는 정반대의 하느님이다. 구원하는 하느님은 숨어 있지만, 창조하는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이와 같이 하느님을 찾는 길은 역설적이고 양면적인 것 같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하느님은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지 않을 때, 여러분은 하느님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찾으려면, 특히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찾으려면 겸손 곧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잠복해 있는 이름들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듯이 하느님에게도 투영하게 마련이다. ‘영혼이 하느님에게 붙이는 이름은 모두 영혼 자체의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61)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10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코린 9-16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세례를 받은 그는 아프리카의 고향에서 이러한 종류의 삶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했다.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수덕 생활을 해 나가기 원한 그는 이 세상의 번잡함과 교회의 직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 아직 공석으로 있는 도시들을 피했다. 타가스테의 공동체는 함께 생활하는 형제들이 너무 많아져서 약 8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 히포(Hippo)에도 자신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형제들을 모으기 위해 이 도시로 나와 그는 이 도시의 주교 발레리우스(Valerius)의 강론을 들었다. 이 주교는 그리스 계통 사람이어서 이 지역 사람들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좌 주교를 하나 두도록 그에게 요청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경우와 비슷하게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이 교구소속의 사제가되었다.
391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395년에 주교품물 받았다. 이때부터 히포는 430년에 그의 생이 마감되기까지 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그는 이 지역보다 더 광범위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생겼을 때와 공의회에 참여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자신의 공동체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외적 활동 무대를 찾았는데, 이와 동시에 자신의 내적 활동 무대에도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교였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히포에 있는 성당의 본당 신분의 역할을 수행한 정도였다. 이 일을 수행하면서 그는 대단한 열정으로 신학적 작업을 계속했고, 마니케이즘, 도나티즘, 펠라지아니즘과 같은 이단들을 거슬러 싸워 나갔으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지켜 가기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전기 작가 포시디오(Possidius)는 전기에서 그를, 설교자와 전례 집행자 그리고 일반 사람들과 좋은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으로 서술하고 있다.(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