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요한복음과 달리, 그리고 루카복음과도 달리
마태오복음은 사도들의 부르심을 아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고,
자기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도 아주 간략하게 기술할 뿐 아니라
얘기의 초점도 자기의 부르심이 아니라 주님의 파격행적입니다.
왜 이렇게 간략하게 전하는 것일까?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 레위가 아니라 마태오가 맞고
마태오복음의 저자가 마태오 사도가 맞다고 친다면
죄인인 자기가 부르심 받았을 때의 그 감동을 전할 법도 한데
어찌 마태오는 자기의 부르심을 이리 간략하게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응답이 부르심에 주인공 자리를 내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응답하는 마태오 자기가 아니라
부르시는 주님께 주인공 자리를 내 드리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부르심에 응답한 얘기를 제 중심으로 얘기한다면
부르심을 받기까지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저의 처지가 어땠는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받은 감동이 어땠는지,
그리고 응답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등을 장황하게 얘기할 겁니다.
그러나 마태오 사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너무도 절대적인 것임을 Highlight(강조)하기 위해
“나를 따라라”는 말씀 한 마디에 군소리 없이 따르는 것으로 기술합니다.
그렇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분입니다.
절대적인 부르심 앞에서 그는 자기를 보지 않았고 과거도 보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하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죄를 보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본 것이고,
죄인인 자기를 보지 않고 주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보지 않고 자기만을 본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의 과거를 돌아보거나 과거에 매이지 않고
즉시 “따라라”고 하시는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의 응답은 즉각적이었고 그의 태도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름은 이러해야 합니다.
즉각적이지 않고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영영 떠나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도 현실을 떨치고 떠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지긋지긋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현실은 지독한 접착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란 과거가 축적된 현재이고
나라는 존재가 과거로부터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내가 나이지 미래의 나는 아직 내가 아니고
어떻게 될지 알 수도 없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마태오 사도에게 있어서 주님은 확실한 현재를 떨치고
불확실한 미래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분이셨습니다.
주님의 인격적 확실함, 곧 사랑에 대한 확신이
상황적 불확실함의 불안을 불식시킨 거겠지요.
자기 일생의 죄가 너무도 크고 그 죄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죄보다 훨씬 더 큰 주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더 체험하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