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유독 ‘한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리고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우리라고 합니다.
‘한때’라는 말은 과거를 지칭하는 말이고
그 후에 달라졌을 경우 쓰이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한때 우리는 잘 지냈다.’라고 하면 지금은 안 그렇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한때 우리는 원수지간이었다.’라고 하면 지금은 사이가 좋은 거지요.
아무튼 ‘한때’라는 말은 인생 반전을 뜻하는 말인데
오늘 저는 어떤 반전을 살아야 하는지 보려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야 할 반전은 은총을 받는 반전이고,
저는 진정 은총을 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일부러 죄에 빠져 살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20세를 전후해서 악마적인 꼬드김이 있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처럼 한때 방황과 방탕한 삶의 그 쓰라림을 겪어야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생기며 반전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에 예비고사를 보러 갈 때 부러 술을 마시고 갔고,
그래서 시험에 부러 떨어졌으며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살고 싶었고,
그렇게 신물이 날 정도로 죄의 어둠에 있다 보면 빛을 찾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용기가 없어서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한때 그리고 한동안 저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했다는
바오로의 말씀을 잘못 신봉하며 일탈하고 싶어 했고 은총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긴 해도
은총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은 잘못이 아니기에
그렇게라도 은총을 받고 싶어 했던 그때가 아름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는 현재의 저에 대한 반성입니다.
현재 저는 은총을 받고 싶은 갈망이 그때만큼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이미 은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현재의 은총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은총에 안주한다는 것은 현재의 은총에 만족하며
더 큰 은총 또는 더 많은 은총에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죄를 뭉개고 있으면서도 은총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털고 일어나서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인데도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 하느님 은총만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에 기대어 일도 안 하고 마냥 방탕하게 사는 것만 같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말씀을 가지고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데 우리는 은총으로 구원받고 있습니까?
은총으로 구원을 향해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 가느냐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또 말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인 것이 맞습니까? 훼손된 작품은 아닙니까?
하느님 은총 중에 있는 것 맞나?
하느님 작품인 것 맞나?
이런 반성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과 참여 덕분에
비가 엄청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여러분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하느님과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수익 금을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쓰였는지 나중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