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요즘 ‘바비’의 삶을 삽니다.
‘바라고 비는’ 삶을 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바라기만 하는 사람은 욕심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사람은 욕심 때문에 바라기만 하지 않고 빌기까지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고
진정 좋은 사람 되기를 바라는, 사랑 때문에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람에도 급이 있습니다.
급이 낮은 사랑과 바람은 세속적으로 잘 되기를,
예를 들어서 세속적으로 승승장구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오로는 영적으로 차원 높게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라는 것도 세속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영적입니다.
그는 첫째로 에페소인들의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기를 바라는데
자기들의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굳세어지게 해달라고 빕니다.
둘째로 그는 에페소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우리 신앙인에게 실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도 사랑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죽지 않고 싱싱하고,
그렇지 못한 나무는 메말라 가고 마침내 죽어버리듯이
우리의 사랑이 점차 메말라 가고 마침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없는 우리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조금밖에 충전되지 않은 건전지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조금 쓰고 나면 금세 바닥이 나버리는 건전지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고
그래서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이 그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라고 빕니다.
관건은 어떻게 그 사랑을 알게 되느냐,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느냐입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알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사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 사랑할 것이고,
사랑하다가 실패도 할 것이고,
실패하기에 또 기도할 것이고,
그러면서 점차 그리스도의 사랑에 조금씩 뿌리가 내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뿌리 내리기는 전 생애적인 것이고,
기도도 사랑도 중단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