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하면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표시로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고를 들으면서 일치를 보존하려고 애쓰라는 말이
유독 눈에 들어왔는데 왜 이 말이 유독 제 눈에 들어왔을까요?
그것은 아마 전에 비해 요즘 제가 그러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전에는 저뿐 아니라 모두가 일치를 중요하게들 생각했고,
그래서 일치를 이루려고 무던히도 애들을 썼지요.
그러던 것이 요즘 와서 일치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일치를 부르짖으면 ‘왜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눈으로 봅니다.
사실 요즘은 일치를 부르짖는 것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묵살하고 획일적으로 하나로 만들려는,
그런 시도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치, 하나가 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렇게 중요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우리가 이루려 애써야 할 일치는 사랑의 일치이고,
이런 일치는 이루기 힘들기에 못하지 할 수 있다면 모두 이루고 싶어 하는 겁니다.
사실 진정한 자유와 다양성은 일치를 지향할 때 그 가치가 있고,
참다운 일치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와 다양성을 묵살치 않습니다.
사실 참사랑은 개인과 개인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성령의 사랑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다양한 은사가 주어지고,
성령 안에서 그 많은 다른 것이 일치를 이룹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곳에서, 성령의 은사는 각기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성령을 모시고 있다고 했고,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치의 관건은 성령의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이고,
일치를 이루려고 애쓰지 않는 것도 이 사랑을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이유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렇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을 수반하는,
또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밑받침되는 사랑이어야 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렵지 않고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참사랑은 그렇게 할 수 없기에 하다가 실패하거나
이것을 알고 난 뒤에는 아예 사랑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랑 포기자들이 많은 요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린 다시 용기를 내며,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거듭 상기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
참사랑은 이런 사랑이기에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없습니다.
어제 뿌리내리기에 이어 오늘도 사랑은 전 생애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들입습니다.
이런 사랑 도전하시겠습니까?
사랑 포기자가 되시겠습니까?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