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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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7-9)
성조·예언자·복음, 세 번에 걸친 주님의 방문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해서도 꼭 하실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간청합니다 ...
이 나무는 인류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첫 해, 곧 족장 시대에 이 나무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듬해에 해당하는 율법과 예언의 시대에도 찾아오셨습니다. 바야흐로 복음과 함께 세 번째 해가 밝았습니다. 아무래도 나무가 베이게 생겼는데 자비로운 이가 자비로운 이에게 청합니다.
그는 주인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드러내려고 간청하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거름은 겸손을 뜻합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나무가 한쪽에는 열매를 맺고 다른 쪽에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갈라놓으실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집단에도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영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영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면, 영혼의 여섯 가지 기능이 저마다 신적인 사랑으로 도금된 금반지를 끼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영혼에게는 세 가지 낮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기능은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능에는 교화라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이 교화의 반지는 이성적인 기능 속에서 언제나 신적인 빛에 의해 교화됩니다. 둘째 기능은 분노라고 불립니다. 이 반지에는 평화라는 이름의 금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평화 속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이고, 평화를 벗어난 사람은 하느님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능은 욕망이라고 불립니다. 여러분은 이 기능에다 자족이라는 이름의 반지를 끼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피조물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여러분에게는 하느님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하여 싫증이 날 정도가 되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267)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2코린 1-7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의 밑바탕을 이루는 ‘혼 사상'이 한국의 대승 불교를 만나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거꾸로 말해서 불교가 한민족의 ‘혼 사상’과 어떻게 지평 융합을 이루어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의 함수 관계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사상 중 ‘하나’를지향하는 ‘일승 지향성'과 관련된 사상만을 제한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흔히 학자들은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로서 수행 해탈을 통해 ‘자력(自力) 구원' 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적 판단은 불교가 살아서 생동하는 종교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다. 대덕 학승으로부터 재가 불자에 이르기까지 1천만 한국 불자들에게 있어 불교는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을 통해 발생하고 또 이어져온 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체계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들에 귀의하고, 불경을 비롯한 진리의 가르침 총체에 귀의하며, 진리 구도가 집단 승단에 귀의하는(僧寶) 삼보(二寶)를 숭앙 경배하여 신심을 도탑게 하는 것이 엄연한 불교 현싱이기 때문이다.
만약 석기모니불, 괸음보살불, 이미타불, 약사여래불, 지장보살불 등 한국 불자들이 귀의하는 불교적 신심을 “지적 능력이 결여된 대중 불교의 방편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오만한 지식인이거나 종교를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철학도에 불과할 것이다.(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