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1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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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
우리는 ... 육신의 병을 한두 번 치료해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 주는 의사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또한 욕정에 사로잡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를 꾸짖고 벌할 권한과 의무를 지닌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서 다른 사람의 짐을 져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갈라 2 참조). 마태오 복음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나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그러자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르셨지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페 4,23).
영혼이 안에서 “쉬면서 수동적으로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말에 주목하라. 이와 같이 우리는 힘쓰기보다는 버리고 무심코 가라앉을 펼요가 있다. 이 직관의 단계에서 우리의 앎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지성이리는 이름의 기능 때문이다. 지성은 이미지 없이, 매개물 없이, 닮은 것 없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아는 지식을 제공한다. 바로 이 심층에서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은 우리와 같이 된다.
하느님을 하느님 아닌 분으로 전락시키는 셋째 경우는 우리가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다. 하느님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싫증 난 적이 없을 만큼 하느님은 무한하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여러분에게는 하느님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실로 여러분이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한 나머지 하느님에 대하여 싫증이 날 정도가 되었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277)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2-9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히브 2,5-18
구원의 영도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