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생활양식으로 삼은 복음을 가지고
오늘 프란치스코 축일 묵상을 합니다.
어제 연중 26주 목요일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가거라.”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라”는 말씀을 200주년 성서는 “떠나가라”로 번역하였습니다.
<가라>는 말에는 굳이 그 말을 쓰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과 <향해 가는 것>이 내포되어 있으니
<가라>로 번역하든 <떠나가라>로 번역하든 무방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200주년 성서는 떠나감을 더 강조한 것입니다.
뒤에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두고 가라고 하셨으니
떠나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2천 년 전 제자들에게도 800년 전 프란치스코에게도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머물지 말고 가라고 명령하시는데,
가라는 이 명령이 그저 가는 것이라면 우리가 순명키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떠나서 가라는 말씀일 때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떠나기가 쉽지 않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사는 곳이 지긋지긋하여 떠날 수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는 곳이 너무도 익숙하고 그것에 길들여진 사람이 떠나는 것은 너무도 힘듭니다.
저의 요즘을 봅니다.
옷을 예로 들면, 거의 단벌 신사처럼 입는 옷을 계속 입습니다.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가난해야 할 저의 가난에 비해 너무도 부끄러울 정도로 옷이 많지만
입던 옷이 편해 그냥 계속 입는 것이고 다른 옷은 입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입던 옷이 편하고 다른 옷이나 새 옷은 불편한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편안便安함에 안주安住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편안함에 안주할 때
우리는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뿐 아니라
편안하지 않으면 불안정不安定하게 되고,
불안정하면 삶이 불안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현재의 불안정이 미래의 불안不安까지 야기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불안정이 깨지는 것만으로도 미래까지 불안하건대
그렇다면 미지의 미래, 다시 말해서 알 수 없는 미래나
더 나아가 고생이 예상되는 미래는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불안한 미래를 향해 우리가 떠나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주님은 그렇게 불안한 미래를 향해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주님은 도대체 무슨 심보이고,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양들은 도대체 무슨 배짱인 것입니까?
제 정신들입니까?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가라고도 하지 않고, 가란다고 가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들은 제 정신들이 아닌 것인데,
여기서 제 정신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육의 정신(spirit of the flesh)이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니고,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을 가지고 있으면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해 미쳤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프란치스코도 미쳤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미치지(도달하지) 못하면 주님으로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미친 사람은 주님께 도달한 사람이며
주님의 영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에 미친 사람을 제 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이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 가운데 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면 주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성령에 이끌려 악령에게 가신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들과 프란치스코도 성령에 이끌리어 갔습니다.
그리고 돈이나 여행보따리를 가지고 가지 않고 다만 평화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만 평화를 가지고 갔기에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복음이 전해졌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는 싸우지 않고 그저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났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슬람 술탄(왕)한테 간 적이 있고 늑대한테 간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슬람 술탄과 늑대를 두려워하여 무기를 들고 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그들의 형제로 갔고 평화를 가지고 갔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슬람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귀한 선물과 함께
자기 나라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통행증을 줬습니다.
늑대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을 잡아먹던 늑대가 프란치스코에게는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더 이상 해치지 말라는 프란치스코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진정 형제로 가면 그는 형제가 되고,
진정 평화로이 가면 그도 순응합니다.
프란치스코 대축일 제 1 저녁기도 성무일도에 다음과 같은 후렴이 있습니다.
“그가 창조주께 순종하였기에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순종하였도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진정 주님의 말씀대로
평화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 미쳤다고 하던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섰고
사람에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프란치스코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진정 주님 평화의 도구로서 가고,
평화로이 가는 우리이어야 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모든 프란치스칸들과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를 사랑하시기에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저희까지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엇보다도 훌륭한 성인을 사부로 두고 있으면서도 그답게 살지 못하는 저희를 그래도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그런 저희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를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