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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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관심과 수고
사람들은 지상에서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명을 약속받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습니다 ... 그러나 덧없는 현세 삶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것을 위해 너무나 애쓰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가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미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합니다. 죽음이 저만치서 고개를 내밀면 인간은 어떤 고통을 겪고 어떠한 어려움을 견뎌 냅니까! 달아나고 숨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 몸값으로 지불하고 온갖 고통과 불행을 견디며 의사를 부르고 별짓을 다 합니다. 인간은 조금 더 살기 위해 이루 말 못할 고통을 겪고 전 재산을 다 쓰면서도 영원히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과 관심을 바친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연기하기 위해 온갖 수를 써서 고작 며칠 더 사는 사람들을 지혜롭다고 말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살아 영원한 날을 잃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본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우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방법, 곧 부정의 길로 알려진 방법을 계속 답사하고 있다. 설교 16에서는 의지를 철저히 버리는 것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했다면, 본 설교에서는 지성을 철저히 버리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밝히고 있다. 버림은 하느님만이 완수할 수 있지만,우리도 버릴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준비는 우리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되돌아가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는 기억, 이성 의지, 감각, 상상력과 같은 “군중”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 우리 안에 있는 더 심원한 일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부정의 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하느님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선하며 지혜로우며 자비롭다고 하는 생각과, 하느님의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개념들이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모든 관념이 아무리 선하고 신성하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오감을 통해 밖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본 셜교에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하고 있다. 그는 독거(獨居)를 답사하고자 한다. 버리는 법과 그대로 두는 법을 익힌 사람 속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독거다. 독거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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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3. 우리의 형제자매 피조물
(일리아 델리오 OSF/키쓰 더글라스 워너 OFM /파벨라 우드: 김일득 모세 OFM 옮김)
프란치스코: 생태환경의 주보성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생태 환경 보호를 증진하는 이들의 주보 성인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하느님중심적 삶의 중요성올 알아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프란치스코가 누렸던 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생태적 이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이러한 보편적 인식올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공부하고 따라야 할 거룩함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모범올 통하여 우리가 되고자 갈망하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구체화 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바로 그러한 성인이며 아마도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인류적인 매력은 단순한 마음, 헌신적인 그리스도를 따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모든 피조물과의 친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을 형제이자 연인으로서, 또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의 친구로서 열정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태 환경의 주보 성인을 가진다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또한 곳곳에서 우리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신앙인들에게 이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프란치스코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업적올 보았으며 피조물을 사랑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도 우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올 사랑함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함 사이에 그 어떠한 간극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태양을 한껏 즐겼으며, 별들을 황홀하게 쳐다보았고, 산들바람과 함께 춤추었으며, 불에 마음이 이끌렸고, 물에 경탄하였으며, 땅을 사랑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고, 피조물이라는 선물의 풍성함에 더더욱 하느님올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현대 과학을 훨씬 앞서 시를 통하여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상호 의존성을 찬미하였으며 모든 피조물을 ‘선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상호 의존성,또한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상호 의존성올 알아보았습니다. 둘째로,프란치스코는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올 체험하였습니다. 이는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가장 도움이 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칸들은 고유의 신학 전통 전반에 걸쳐 피조물의 중요성을 ‘하느님중심적’인 것으로 계속해서 강조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체험을 설파한 방식은 이 프란치스칸 신학 전통의 피조물에 대한 강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선이신 하느님’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강조는 피조물은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계시라고 말하였던 보나벤투라나 둔스 스코투스와 같이 저명한 프란치스칸 신학자들에게 영감올 불어넣었습니다.
셋째로, 프란치스코는 성찰적 실천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세상의 고통을 직면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프란치스코를 기도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연민으로 가득 찬 실천으로도 이끌었고,또한 복음적 가치를 선포하도록 영감올 불어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