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상반된 얼굴
위가 어딘지 알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빛을 알려면 어둠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늘을 알려면 땅을 알아야 하고 영광을 알기까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알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나를 알려면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거울에 비친 나를 앎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인식의 상반된 진리는 한쪽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안다고 하기까지 그 반대를 경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나중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영성 생활은 불필요한 짐을 벗고 지금 하늘의 기쁨을 누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람은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겉옷을 벗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포장하고, 증명하고, 자랑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느라고 자기에게 갇혀있기에 객관적인 시력을 빼앗깁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감옥에서 누군가를 이용하고 탓하고 비난하기에 바쁩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일시적인 인격은 행위 동시적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변장술에 능하고 변화에는 둔감한 상태는 우상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그렇게 사로잡히게 하고 노예로 만들어 결국 파멸과 단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입니다. 지금 내 모습에 취하면 약이 없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진정한 내가 아님을 기꺼이 알고자 할 때만 정직하게 나를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일하시는 주님께서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압도적인 사랑으로 나를 깨우기 전에는 자아도취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해야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오늘의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사람이 되신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이해하려면 먼저 영원부터 존재하는(골로 1,15-20) 그리스도(구세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신 육화하신 하느님입니다. 부활하신 뒤에 어디에나 계신 분, 지금 전체 인류와 피조물을 포함하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을 모르면 지금 행복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변형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2,36) 그분은 당신의 정체성에 우리를 포함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만들자” 우리에겐 하느님의 DNA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없는 인간과 피조물은 상상할 수 없고 인간과 피조물이 없는 하느님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새롭고 충격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 속에 우리와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포함시킨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것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포장된 거짓 자아입니다. 아무리 겉 포장으로 잘 꾸며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질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창조하시고 내 마음을 깊이 꿰뚫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버려야 할 것은 인과응보의 틀에서 나온 왜곡된 지식과 포장된 나입니다. 지금 행복하기 위해서는 겉 포장을 벗긴 진실된 나의 모습과 당신의 정체성에 포함된 나를 찾는 일이 우선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선에서 흘러나오는 선의 흐름에 나의 자유를 내어 맡기고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잃고 방황하던 내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아 빛을 반사하는 반사된 선과 공유된 선으로 관계를 비출 때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상반된 인식으로 서로를 비출 때 비로소 앎이라는 인식의 지평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우리의 관계를 뚫고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들 안에서 서로를 내어주는 선의 흐름을 볼 때 지금과 미래의 하느님 나라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여 회심을 통해 자기에게서 해방된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봅니다. 말씀의 권위가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봅니다.
통제되지 않는 나와 통제되지 않는 너는 나에게 고통스런 아픔을 안겨줍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창조로부터 내려오는 선의 흐름이 나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식의 상반된 터널을 지나야 밝은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