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주님 부활 체험을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
깊이 새겨볼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 체험의 시간과 장소입니다.
우선 시간을 보면,
“주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복음 전체를 보면 제자들이 구원자 주님을 체험을 할 때는
늘 새벽,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풍랑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때가 바로 새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부활하신 뒤 밤새 고기잡이 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때도 새벽입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새벽은 미래의 시간으로 보면 빛이 비치고 낮이 시작되는 시간이지만
과거의 시간으로 보면 그 깊은 밤을 꼬박 새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밤, 우리는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노래했는데
빛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둔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합니다.
빛이 없는 어둔 밤이 얼마나 무서운지 체험을 해야 하고
빛이 없는 어둔 밤이 얼마나 지겹고 긴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없는 밤이 얼마나 무섭고
주님이 없는 밤이 얼마나 힘겹고
주님이 없는 밤이 얼마나 긴지를 뼈 속까지 체험해야 합니다.
새벽이란 그 체험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고
죽음에서 벗어나려 밤새 노를 저었지만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때 나타나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볼 것은 장소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는 무덤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가
봄의 생명이 가득한 꽃밭이 아니고,
젊은이들의 싱그러움이 넘치는 대학 캠퍼스 같은 곳도 아니고,
죽은 사람들이 거하는 무덤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님은 우리 죽은 자들을 위해 죽은 자가 되시었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무덤은 그저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이 아니고
사랑하는 분이 묻혀 있고 사랑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을 보려면 죽어있는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이는 선로에 떨어진 나를 구하고 대신 죽은 사람의 사랑을 보려고
그가 죽어 묻힌 곳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체험의 첫 번째 행위는 무덤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분이 묻혀 있는 무덤으로 먼저 간 것은
제자들이 아니고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보다 그가 더 주님을 사랑했나봅니다.
그렇더라도 아무튼 제자들도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묻혀 있는 사랑을 보러 간 그들이 본 것은 수의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들이 본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덤에는 아니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음 가운데 계시지 않으십니다.
죽은 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오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궁극적인 사랑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도 사랑이지만
죽은 이들을 살리시는 것이 더 큰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어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죽어 계신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다음
“보고 믿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보고-믿는 것,
이것이 부활 체험의 정식입니다.
첫째로 가야 합니다.
주님 죽으심에 실망하고 주저앉아 있어서는 아니 되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되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으려고 저자거리로 가서는 아니 됩니다.
사랑의 죽음을 보러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둘째로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가운데 계시지 않음을 봐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셋째로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이 살리신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주님의 사랑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는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주님 부활 체험을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
깊이 새겨볼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 체험의 시간과 장소입니다.
우선 시간을 보면,
“주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복음 전체를 보면 제자들이 구원자 주님을 체험을 할 때는
늘 새벽,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풍랑을 만나 사투를 벌이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때가 바로 새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부활하신 뒤 밤새 고기잡이 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때도 새벽입니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새벽은 미래의 시간으로 보면 빛이 비치고 낮이 시작되는 시간이지만
과거의 시간으로 보면 그 깊은 밤을 꼬박 새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밤, 우리는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고 노래했는데
빛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둔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합니다.
빛이 없는 어둔 밤이 얼마나 무서운지 체험을 해야 하고
빛이 없는 어둔 밤이 얼마나 지겹고 긴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없는 밤이 얼마나 무섭고
주님이 없는 밤이 얼마나 힘겹고
주님이 없는 밤이 얼마나 긴지를 뼈 속까지 체험해야 합니다.
새벽이란 그 체험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고
죽음에서 벗어나려 밤새 노를 저었지만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때 나타나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볼 것은 장소입니다.
제자들이 처음으로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는 무덤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장소가
봄의 생명이 가득한 꽃밭이 아니고,
젊은이들의 싱그러움이 넘치는 대학 캠퍼스 같은 곳도 아니고,
죽은 사람들이 거하는 무덤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님은 우리 죽은 자들을 위해 죽은 자가 되시었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무덤은 그저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이 아니고
사랑하는 분이 묻혀 있고 사랑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곳으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을 보려면 죽어있는 그곳으로 가야합니다.
이는 선로에 떨어진 나를 구하고 대신 죽은 사람의 사랑을 보려고
그가 죽어 묻힌 곳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체험의 첫 번째 행위는 무덤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분이 묻혀 있는 무덤으로 먼저 간 것은
제자들이 아니고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보다 그가 더 주님을 사랑했나봅니다.
그렇더라도 아무튼 제자들도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묻혀 있는 사랑을 보러 간 그들이 본 것은 수의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들이 본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이 무덤에는 아니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음 가운데 계시지 않으십니다.
죽은 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오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궁극적인 사랑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도 사랑이지만
죽은 이들을 살리시는 것이 더 큰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어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죽어 계신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 다음
“보고 믿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서-보고-믿는 것,
이것이 부활 체험의 정식입니다.
첫째로 가야 합니다.
주님 죽으심에 실망하고 주저앉아 있어서는 아니 되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되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냄새를 맡으려고 저자거리로 가서는 아니 됩니다.
사랑의 죽음을 보러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둘째로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가운데 계시지 않음을 봐야 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셋째로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이 살리신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고,
주님의 사랑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는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신 예수...
환희에 찬 부활을 기쁨으로 맞으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인가 봅니다. 하지만 빛이 멀리서 보이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아요.
주님을 믿기 때문에 자매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고 있으며 주님을 느낍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 찬미 영광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