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36계에 反間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간계라고도 하는데 적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
친한 사이를 이간하여 무력화시키는 계략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도 이 반간계를 쓰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고 하자
바오로 사도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서로 갈라서게 합니다.
자기는 바리사이 출신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다고 함으로써
부활과 영의 세계를 부정하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를 이간합니다.
그전까지는 바오로 사도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의 이 말에 의해 사이가 갈라지고 서로 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오로의 이 반간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앙인으로서 이런 계략을 써도 괜찮다고 해도 될까요?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한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쓴 것이 반간계인 것은 맞지만
병법에서 쓰는 반간계와는 분명 다릅니다.
병법에서는 상대가 물리쳐야 할 적이고
전투에서 나의 승리를 위해 적들이 내분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정정당당하지 않고 술수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인들은 적이 아니라 복음선포의 대상이고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이지 바오로가 아닙니다.
그러니 반간계를 쓴 것은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부당한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도 거짓과 술수가 아니라 진실되기에 정정당당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혜라고 해야겠지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지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나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때 장사하는 분들이 고민을 호소합니다.
장사를 하면 이익이 나야 하는데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이익을 내야 하는지,
팔기 위해서는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이 사기는 아닌지.
참으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먹고 살만한데도 너무 탐욕을 부리고,
상대가 어수룩하다고 바가지를 씌우며,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익을 내고,
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선전을 좋게 하는 것은
부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장사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싸게 판다면
정당한 지혜에 더하여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에게는 유다인들의 계략에서 빠져나와야 할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풀려난 날 밤에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하루 빨리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바오로의 열망이 성령의 감도하심을 만나
유다인들의 계략에서 빠져나올 계책을 생각해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복음적 열망과 성령의 만남,
이것 우리도 필요하겠지요?
이간계라고도 하는데 적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
친한 사이를 이간하여 무력화시키는 계략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도 이 반간계를 쓰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고 하자
바오로 사도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가 서로 갈라서게 합니다.
자기는 바리사이 출신이며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다고 함으로써
부활과 영의 세계를 부정하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를 이간합니다.
그전까지는 바오로 사도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의 이 말에 의해 사이가 갈라지고 서로 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오로의 이 반간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앙인으로서 이런 계략을 써도 괜찮다고 해도 될까요?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한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쓴 것이 반간계인 것은 맞지만
병법에서 쓰는 반간계와는 분명 다릅니다.
병법에서는 상대가 물리쳐야 할 적이고
전투에서 나의 승리를 위해 적들이 내분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정정당당하지 않고 술수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유다인들은 적이 아니라 복음선포의 대상이고
적대시하는 것은 그들이지 바오로가 아닙니다.
그러니 반간계를 쓴 것은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부당한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도 거짓과 술수가 아니라 진실되기에 정정당당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혜라고 해야겠지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지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나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때 장사하는 분들이 고민을 호소합니다.
장사를 하면 이익이 나야 하는데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이익을 내야 하는지,
팔기 위해서는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이 사기는 아닌지.
참으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먹고 살만한데도 너무 탐욕을 부리고,
상대가 어수룩하다고 바가지를 씌우며,
가짜를 진짜라고 속이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익을 내고,
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선전을 좋게 하는 것은
부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장사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싸게 판다면
정당한 지혜에 더하여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에게는 유다인들의 계략에서 빠져나와야 할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풀려난 날 밤에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하루 빨리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바오로의 열망이 성령의 감도하심을 만나
유다인들의 계략에서 빠져나올 계책을 생각해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복음적 열망과 성령의 만남,
이것 우리도 필요하겠지요?
증언하고 실행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을 충실히 합니다.
일상생활의 영성이란 말을 기억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