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았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객관적인 관점과 객관적인 진술.
카이사리아 총독 페스투스가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바오로 사도와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의 문제에 대해 진술합니다.
객관적인 관점과 객관적인 진술은 일반적으로 좋은 뜻이고,
특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정에서는 더 그러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우 주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고,
그래서 매우 주관적으로 사태에 대해서 진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매우 주관적이라는 말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사실을 왜곡한다는 뜻이 다분히 들어있습니다.
이 면에서 페스투스는 매우 훌륭하게 오늘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관점과 진술이 오늘은 왠지 불편합니다.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라니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예수라는 사람”
“몇 가지 문제뿐”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예수님을
“그저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불경스러워 못내 불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문제를 “뿐”이라고 하는 게 더욱 불편합니다.
“뿐”이라고 하면 별 거 아니라는 뜻이고,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객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 문제가 별 거 아니고 무시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이 문제는 별 거 아닌 것이 아니고,
자기 인생 전부를 거는 문제이고
죽음까지 거는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적대자 유다 지도자들에게도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객관적이란 보통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고,
우리도 어떤 때 하느님을 객관적으로 보고 만나기 쉽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으로 만나고,
“나를 지어내셨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은 나의 주님도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분도 내가 사랑하는 분도 아닐 수 있으며,
“나를 지어내셨을 뿐”
나를 지켜보지도 보살피는 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번 피정 중에 성당에 가서 자리를 잡다보니
우연히 주교님과 비스듬한 뒤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교님께서 일부러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기도하러 가면 성당 문이 조금 열려 있고,
조금 열려 있는 성당 문으로 보이는 원경의 산과 바다가 특별했습니다.
나의 창으로 들어온 비둘기 같이
나의 정원에 심겨진 소나무 같이
그 문을 통해서 산과 바다가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산과 바다는 나와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나만을 위한 산과 바다가 아니고 나의 소유도 아닙니다.
내가 그 산과 바다가 있게 하지도 않았고
내가 특별히 애정을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창으로 보면 나의 산이고 나의 바다가 됩니다.
나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산이고 바다입니다.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고 누구에게나 사랑이신 객관적인 하느님,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았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객관적인 관점과 객관적인 진술.
카이사리아 총독 페스투스가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바오로 사도와 유다인 지도자들 사이의 문제에 대해 진술합니다.
객관적인 관점과 객관적인 진술은 일반적으로 좋은 뜻이고,
특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정에서는 더 그러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우 주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고,
그래서 매우 주관적으로 사태에 대해서 진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매우 주관적이라는 말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사실을 왜곡한다는 뜻이 다분히 들어있습니다.
이 면에서 페스투스는 매우 훌륭하게 오늘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관점과 진술이 오늘은 왠지 불편합니다.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라니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예수라는 사람”
“몇 가지 문제뿐”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예수님을
“그저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불경스러워 못내 불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문제를 “뿐”이라고 하는 게 더욱 불편합니다.
“뿐”이라고 하면 별 거 아니라는 뜻이고,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객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 문제가 별 거 아니고 무시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이 문제는 별 거 아닌 것이 아니고,
자기 인생 전부를 거는 문제이고
죽음까지 거는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적대자 유다 지도자들에게도 이것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객관적이란 보통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이고,
우리도 어떤 때 하느님을 객관적으로 보고 만나기 쉽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으로 만나고,
“나를 지어내셨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분”은 나의 주님도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분도 내가 사랑하는 분도 아닐 수 있으며,
“나를 지어내셨을 뿐”
나를 지켜보지도 보살피는 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번 피정 중에 성당에 가서 자리를 잡다보니
우연히 주교님과 비스듬한 뒤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교님께서 일부러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기도하러 가면 성당 문이 조금 열려 있고,
조금 열려 있는 성당 문으로 보이는 원경의 산과 바다가 특별했습니다.
나의 창으로 들어온 비둘기 같이
나의 정원에 심겨진 소나무 같이
그 문을 통해서 산과 바다가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산과 바다는 나와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나만을 위한 산과 바다가 아니고 나의 소유도 아닙니다.
내가 그 산과 바다가 있게 하지도 않았고
내가 특별히 애정을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창으로 보면 나의 산이고 나의 바다가 됩니다.
나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산이고 바다입니다.
하느님도 그러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시고 누구에게나 사랑이신 객관적인 하느님,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진리이신, 선이신, 아름다움이신
나의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