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내일의 예수님 탄생에 앞서 오늘 요한이 탄생합니다.
범상치 않은 탄생에 친지들과 사람들은 웅성거립니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아이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는 점점 운명론자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정해놓은 운명대로,
인간은 하나부터 열까지 그대로 사는 거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그런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나,
미국까지 안 가고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태어난 것이나,
제가 100년 전이 아니라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나,
제가 저의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나,
제가 이런 성격과 이런 체질로 태어난 것이나,
제가 이런 생김새와 건강으로 태어난 것이나,
다 나의 뜻이나 누구의 뜻대로 된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된 것이니
지금의 이런 내가 된 것은 거의 다 하느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운명이라고 얘기한 것의 뜻도 이런 맥락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탄생한 요한의 인생은 더 운명적입니다.
태어난 아기 요한이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사람들이 웅성대지만
요한은 주님의 선구자로 태어났고 그렇게 운명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런 뜻에서 요한은 부모로부터 이름을 이어 받지 못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지니게 되는 것이고,
즈카르야는 아이에 대한 작명권을 빼앗긴 겁니다.
사실, 우리 세례명도 이런 뜻이고,
수도자들이 착복을 하면서 수도명을 갖는 것도 이런 뜻입니다.
<나의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내>가 되겠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이 나의 운명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수도서원을 한 제가 이런 운명을 주신 하느님을
지금처럼 죽을 때가지 찬미하고 감사드릴 수 있을지
겸손히 돌아보고 자비를 청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