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금요일(마르 6,14-29)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처음 떠오르는 말은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었다.
헤로데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양심이 완전히 무디어지지는 않은 상태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한의 생전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점을 뒷바침하여 준다.
그 러나, 문제는 헤로데가 자기의 양심이 가르치는대로, 즉 내면에서 하느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 자존심, 권력 등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죄의 기회를 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더 키워가는 어리석음 속에 갇혀서 산 사람이라는 점이다.
먼 저, 그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 즉 하느님의 예언자인 줄 알았지만 예언자를 옥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자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아마도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그 딸이 요한의 목숨을 요구할 것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는 신중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였다.
우
리는 살아가면서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일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알 수 없기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붙들고 늘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 즉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놓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보다는 현상에 집착하는 많은 인간들이 범하는 오류인 것이다.
사 오정 부부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쇼핑을 갔다. 그리고 물건을 사며 다른 유모차 옆에 아기 유모차를 나란히 세웠다. 물건을 사고 사오정이 유모차를 밀고 가는데, 아내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이에 사오정이 "조용히 해! 이 유모차가 훨씬 비싼 거야!" 답하더란다.
헤
로데의 어리석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헛된 맹세를 하였더라도 그 잘못을 깨달았다면 지키지 않으면 그뿐이엇다. 그러나 헤로데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요한의 목을 베게 한다.
자
신의 잘못을 만회할 수도 있었지만, 그 알량한 체면,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존경하던 예언자의 목숨을 빼앗는, 즉 하느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이후 양심의 가책에 짓눌리는 삶을 살아가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 러한 헤로데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도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진정 하느님께서 양심을 통해서 일러주시는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본질보다는 현상에 매달리며 헛된 맹세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잘못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더 큰 죄를 저질러버리는 교만으로 하느님에게서 결정적으로 돌아서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