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모욕을 주는데도 간청을 거두지 않고
끝까지 그리고 겸손하게 청하는 한 여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겸손만큼 끈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반대로 교만할수록 한 번 청했다가 가납되지 않으면 토라져 홱 돌아서지요.
어찌 겸손할 때 끈기가 있을까요?
반대로 교만하면 왜 끈기가 없을까요?
교만하면 할수록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자기 뜻대로 될 뿐 아니라 당장 되기를 바라지요.
자기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즉시 그대로 되고,
모두가 즉시 그대로 하기를 바라지요.
이는 마치 창세기 1장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이렇게 기술하지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좋다고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려고 한 것처럼
교만한 사람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처럼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청하는 즉시 흔쾌히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하니 청이 거절을 당해도,
그것도 매우 모욕적으로 거절당해도 바로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모욕은 청이 가납되기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인 양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교도 여자라고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녀의 대단함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이교도 여인이 외간 남자, 그것도 유대 남성에게
감히 접근한다는 것은 보통 여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녀를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겸손한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술의 고수들이 상대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하듯
이교도 여인이 어디까지 겸손하고, 어떤 모욕까지 감수하는지 보신 겁니다.
그런데 과연 여인의 겸손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겸손으로 응답하십니다.
여인이 말한 대로 당신이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말 번역은 이렇게 하대下待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아무튼 여인의 말대로 될 것이라는 것,
여인의 말대로 당신이 치유의 역사를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인에게 순명하신 것입니다.
여인과 주님의 그 대단한 겸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