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돌아보건대 제가 2-30대 때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떤 긴장이랄까 부담이랄까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을 만날 때도 그런 것이 있었지만
개인을 만날 때, 특히 여자를 개인적으로 만날 때 그런 것이 더 심하였고,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사적인 만남, 개인적인 만남을 거의 갖지 않았습니다.
물론 환자 방문이랄까, 봉성체 그런 것은 예외이지요.
왜 그랬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만남으로서 누구와 더 친하다거나
누구를 더 사랑한다거나 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에 제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에 대한 염려 이전에
개인을 만나는 것에 어떤 두려움이 제게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일까요?
제가 진정 한 개인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에 매이거나 빠지지 않고
정말로 하느님 사랑과 보편적인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개인적인 만남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피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고
사실은 개인적인 사랑을 아직도 원하고 애착하기에 두려웠던 겁니다.
그러다 점차 제가 개인적인 사랑에 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자
이제 개인적인 사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나를 지키기 위해 개인적인 사랑을 피했는데
이제 그를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사랑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보편적인 사랑과 개인적인 사랑이 다 있어야합니다.
우리 사랑은 누구만 사랑하고 누구는 배제하는 그런 사랑이어서도 안 되고
몇몇 사람만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치 못하는 사랑이어서도 안 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치 못하는 그런 사랑이어서도 안 됩니다.
미사와 성사만 공적으로 거행하고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주지 않는 사제,
전 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강론은 하지만 개인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는 사제,
이런 사제는 제사의 거행자는 될지언정
99 마리를 놔두고 한 마리를 찾아가시는 주님의 제자도 목자도 아니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귀와 혀의 장애인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주 특별하게 고쳐주십니다.
그만 따로 데리고 가셔서 단 둘이 마주하십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세워두고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는 게 아니라
단 둘이 마주한 다음 귀에 손도 대시고, 혀에 침도 발라주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시는 기도도 하시며 고쳐주십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주님께 받고 싶으십니까?
이런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그 장애인에게만 이런 사랑을 주셨고,
지금도 몇몇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런 사랑을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여러분 모두
주님의 이 은밀한 사랑, 인격적인 사랑을 받으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또 여러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