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주변에는 또 4천명 이상의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사흘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것을 보는 주님과 제자들의 눈이 다릅니다.
제자들은 이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하는 것 같고
그래서 먹여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주님께서는 군중이 굶주리고 있음에 애처로운 마음이 들고,
먹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으십니다.
제자들은 어찌 이런 마음을 먹지 못하고,
마음 이전에 생각이 어찌 그리 짧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생각이 짧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거나, 적어도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굶고 있으면
“뭘 어떻게든 해야겠는데!”하고 마음을 먹지요.
굶주리고 있는 자식을 보고
“먹을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군!” 하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먹이려고 하지요.
사랑이란 이런 것이기에 사랑 많으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말을 일축하시고
당신이 마음먹으신 것을 실행에 옮기십니다.
우선 광야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일축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이 광야에서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빵을 구하시고 배불리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먹인 곳은 다른 곳이 아닌 광야였습니다.
제자들이 <어디서> 빵을 구하냐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디 다른 곳이 아니고 광야에서 빵을 구하십니다.
제자들은 또 누가 이 광야에서 빵을 구하냐고 합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말조차 일축하시고,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만 물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빵을 구해주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러나 제자들에게만 책임을 다 미루시지 않고
당신이 제자들이 가진 빵으로 사람들을 배불리십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주님과 우리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빵을 구해주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빵을 구해주십니다.
그 빵은 어디서 구하고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광야가 아니라 하늘에서 구하는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이런 묵상도 하게 됩니다.
일곱 개에 불과한 우리의 빵이 곧 하느님의 만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곱 개의 우리의 빵을 적다고 무시하지 말아야 하고,
이 빵이 나의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만나게 되게 하고,
그저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되게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