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단호한 결단을 촉구합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재촉하고 압박합니다.
이런 선택에의 촉구 또는 압박에 대해서
우리는 어정쩡하고, 두루뭉술 넘어가려고 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 그럽니까?
생명과 죽음 중에서 우리는 당연히 생명을 선택하고,
행복과 불행 중에서 우리는 당연히 행복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할 것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선택치 않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주님은 우리에게 선택을 촉구하고 압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종종 이런 식입니다.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을 삼고,
죽음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으로 생명을 선택하는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한 것입니까?
죽음을 피하거나 면한 것이 생명을 사는 것입니까?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한 것이 결코 아니고,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 사실은 불행입니다.
연명하는 것이 생명을 사는 것이 결코 아니고,
생명을 적극적으로 살지 않을 때 그 삶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행복과 생명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않습니까?
행복과 생명이 싫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불행과 죽음보다 행복과 생명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행복과 생명을 적극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선택해야 할 행복과 생명이
우리가 바라고 그래서 보통 선택하는 그 행복과 생명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통 이렇습니다.
슬픔이 없는 기쁨이고,
고통이 없는 즐거움이며,
그리고 이런 기쁨의 생명이고 이런 즐거움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모든 좋은 것을 잃은 다음에 얻는 슬픔의 참 기쁨이고,
온갖 고통을 다 겪고 견디어 낸 사랑의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어제는 저의 공동체 형제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주례사제가 하신 말씀이 오늘 말씀과 많이 잇닿아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1차적으로 취하는 태도는 거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가능한 한 죽음은 생각지 않으려고 하고,
죽음의 영향이 가능한 우리 안에서 미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서 사는 것을 선택해야만 참 생명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내가 선택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자살을 하지 않는 한 죽음도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고
죽은 다음 영원히 산다는 말씀을 우리 오늘 마음에 새기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참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