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
어떤 단식이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단식입니까?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단식과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 같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단식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 아닙니다.
사실 단식은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좋아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이 아니기 십상입니다.
하느님의 단식은 사랑의 단식이고 인격적인 단식인데 비해
우리의 단식은 종종 사랑일지라도 자기 사랑에 불과하고,
그보다도 못하게 자기만족적이고 세속적입니다.
자기 사랑에 불과한 단식?
어떤 단식을 말하는 것인가요?
미용을 위해서 하는 단식,
건강을 위해서 하는 단식.
이런 것도 단식은 단식입니다.
허나 이런 단식은 하느님 단식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단식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단식도 하느님 단식이 아닙니다.
미용이나 건강 단식보다는 더 차원 높은 단식인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럴 수도 있지만 이것도 하느님 단식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한다면,
육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단식을 한다면
이것은 매우 차원이 높은 단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단식은 아직 하느님 단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정신과 영혼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자기만족, 자기성취, 자기완성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아직 또 많이 못 미치는 단식입니다.
하느님 단식은 사랑의 단식이고 인격적인 단식이기에
나를 사랑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단식입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단식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이바지하는 단식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세상을 향한 욕망들이 수없이 많이 솟아납니다.
하느님 단식은 이런 세상 욕망들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세상 욕망을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바꾸고,
하느님을 갈망함이 하느님을 위한 열망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느님 단식은 하느님 사랑에서 이제 이웃 사랑에로 넘어갑니다.
하느님 사랑에 그치지 않고 이웃 사랑에로 확장되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의 단식은 우선 음식을 끊는 게 아니라 나쁜 짓을 끊는 겁니다.
단식일에 일꾼들을 다그치는 일, 주먹질을 하는 일을 멈추고,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커피 한 잔 값인 2천 원이면 아프리카 어린이 한 학급 끼니가 된다는데
옛날에 우리가 성미聖米라는 아름다운 사랑 실천을 했듯이
우리가 비싼 커피나 음식 대신 싼 음료나 음식을 사먹음으로써
그 돈으로 굶주리는 이들의 몇 끼 식사를 제공하는 그런 단식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