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악마는 단식으로 허기지신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당신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이 구절만 듣고는 이 말이 그리 대단한 유혹인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빵과 관련해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듣고 나면, 악마가 유도한 것은, 빵을 통한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으로 더 마음이 기울도록, 즉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 하느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드러내면서, 악마의 유혹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이 구절을 오늘 복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예수를 향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앞의 이야기가 그저 배고픔을 달래는 것에 그쳤다면, 뒤의 이야기는 목숨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물론 하느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드러냈다면, 즉, 십자가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물리치고, 세상이 말하는 그런 왕의 모습으로, 왕좌에 앉으셨다면, 과연 어떠했을까요?
사람들은 진정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모든 적들을 무찌르고,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올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구원의 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인가요? 하느님의 아들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그저 나약한 모습으로 죽어가야 했던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빵 5개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선택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다를 수 있었을까요?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배고프셨다고 이야기 하고 있고, 수난 복음의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몸으로 겪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 유혹을 견디어 내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항상 함께 말씀하신 것은 당신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이 올 것이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이 있다는 것이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의 가장 큰 것이 죽음이기에, 예수님께서도 피해갈 수 있다면 비켜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태 26, 39)
부활. 우리에게도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유혹의 손길이 왔을 때, 고통에서 벗어나 잠깐의 달콤함으로 빠져 들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그 고통을 붙잡고 견디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통을 즐기는 심리적 환자의 모습이 아니라, 고통 이후에 올 더 큰 달콤함, 더 영원한 달콤함을 얻기 위한 현명한 선택의 모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 영원한 달콤함, 그 부활의 기쁨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