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육신 부활(Resurrection of the Flesh)
작 가 :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50- 1523)
제작년도: 1499- 1502
소재지: 이태리 오르비에토 대성당
나라 전체가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과 같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태리는 로마나 베네치아처럼 많이 알려진 도시가 아니더라도 조그만 마을에도 엄청난 문화재가 있는 곳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로마에서 120킬로 떨어진 북쪽에 있는 오르비에토(Orvieto)라는 곳이다. 이곳은 긴 역사를 지닌 마을이고 중세 때 교황이 피난차 자주 머물기도 했던 유서 깊은 조그만 도시인데, 이도시가 온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성체의 기적 때문이다.
1629년 독일 출신의 경건한 사제 베드로가 미사를 드리면서 자기가 축성하는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지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면서, 이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로마 순례를 결심하고 떠나 이태리 북쪽 볼사노(Bolsano)에 이르렀다. 그곳에 있는 순교 성녀 크리스티나를 기념하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축성한 성체가 예수님의 살로 변하면서 거기에 흐른 피로 성체포가 적셔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것을 숨기고자 했으나, 나중에는 마음을 바꾸어 당시 오르비에토에 계시던 교황 울바노 4세에게 알리자, 교황님은 조사관을 파견해서 엄밀히 조사를 마친 후 이것을 기적으로 선포하면서 그 사제의 미사 때 일어난 기적에서 흘려진 스물다섯 방울의 피가 묻어 있는 성체포를 이 대성당에 모시자,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 기적의 기념으로 오늘 온 세상 교회가 기억하는 성체와 성혈 대축일이 유래하게 된다.
이 기적이 일어나던 13세기 이태리에는 세상에 종말이 온다는 믿음 때문에 많은 열심한 신자들이 대단한 참회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단식과 편태 고행으로 자기 죄를 보속하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런 움직임의 영향으로 말세와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런 시대 분위기에 어울리는 세말에 관한 주제이다.
작가는 코르토나(Cortona) 출신으로 당시 유행하던 피렌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로 시작되는 인체 표현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해부학적인 인체 표현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작품화 시켰는데,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표현, 시신의 뼈들과 해골이 널부러진 가운데 새로운 생명으로 피어나는 건장한 나체의 인간을 등장시킴으로서 공동묘지를 연상케 하는 음산한 괴기함을 띈 분위기를 극복하고 경쾌하고 서정성 있는 분위기 있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 대표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체포가 보존되어 있는 대성당의 일부인 브리지오(Brizio)라는 경당에 있는 작품인데, 하느님의 심판의 두려움을 생각하여 회개생활을 권고하는 묵시문학적인 주제를 육신 부활, 천국과 지옥, 적 그리스도(Sermon and Deed of the AntiChrist) 셋으로 나누어 그린 것의 한 부분이며, 그의 스승인 핀투리치오(Pinturicchio: 1454-1513)에게서 배운 공간의 투시요법, 인체의 단축 법, 명암의 손질 등을 탁월하게 표현해서 대담한 나체 표현을 통해 육체가 상징하는 관능과 거리가 먼 상쾌하고 밝은 정신을 표현했다.
그의 이런 작풍 경향은 후일 미켈란젤로에게 대단한 영향을 줄 수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인간 육체를 통한 정신의 표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맞춰 부활한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장면으로 에제키엘 37장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부활 환시”를 재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는데,......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주 하느님께서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 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가 찾은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2절 - 4절)
이 장면은 부활한 영혼과 부활을 기다리는 해골들이 널부러져 있기에 전체적으로 상당히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나, 작가는 과거 어느 사람도 표현하지 못했던 동적이며 생기 있는 신체 묘사로 부활한 생명이 영적이란 이름의 어떤 환상이나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게 보신”(창세기 1, 37) 걸작품으로서의 인간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면 생명과 죽음으로 구분되는 너무 많은 움직임이 있어 혼란함을 느끼게 되나 한 부분씩 분리시켜 보면 대단한 의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이 부분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마치 콩나물 성장을 표현하듯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부활로 시작되는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예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해골들이 마치 물을 머금고 오르는 콩나물처럼 서서히 대지를 향해 천지 창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느님이 흐뭇해하시는 마음으로 주신 생명의 육체를 옷으로 입으며 나타나는 묘사를 통해, 죽음과 생명이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로서 죽음을 극복하고 주님의 선물인 새 생명을 시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생명 하나 하나의 모습이 더 집중적으로 조명되면서 부활한 생명의 개성이 더 드러나고 있다. 중간 부분의 땅바닥에서 죽음의 함정에 빠져 있던 회색 빛 해골이 하느님의 영을 받아 생명의 대지에 얼굴을 내밀고 있으며, 그 주위엔 이 해골보다 먼저 올라와서 새 생명을 되찾은 영혼이 우리와 같은 건장한 육체의 모습으로 죽음의 함정으로부터 조용하면서도 힘차게 올라오는 모습이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극장적 요소를 도입해서 부활의 전 과정을 해골에서부터 생명이 대지로 올라오는 모습을 점진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생명을 되찾은 새 삶을 시작한 부활한 영혼들의 특징을 충만한 삶의 환희를 즐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부활한 생명들은 천상에 사는 성인들처럼 하늘을 향하고 있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이란 무대에서 자기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사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 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춤을 추고,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생기 있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부활한 생명은 이 세상 생명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춤추고 우정을 나누는 것처럼 이 세상 삶의 연장된 모습의 완성이기에 현세 삶을 한껏 즐기면서 충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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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기다리면서 해골처럼 초라하고 고독한 삶을 살던 영혼들이, 하느님의 영이 주신 생명을 되찾은 활기 있는 모습들을 대비시키면서, 부활한 영혼들을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늠름한 육체를 지닌 젊은이처럼 생명을 발산하고 있는 생기있는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에제키엘서 37장 9절에서 10절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살아나서 제 바로 일어서는 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부활한 생명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 모습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과 불안과 절망에서 해방된 밝은 희망에 충만한 모습임을 작가는 부각시키고 있다.
작가는 삶과 죽음의 새로운 실상을 제시하기 위해 새 생명으로 부활한 4명의 영혼과 아직 해골을 기다리는 7명의 죽음을 대조시키는데, 앞 부분의 부활한 생명을 되찾은 영혼은 성기까지 노출시킨 대담한 자세로 조금도 어색함이나 부끄러움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 반면, 그 뒤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앙상한 해골들이 새 생명을 되찾은 동료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음산하고 초라한 모습을 통해 부활한 생명의 기쁨과 생기를 더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면 혼란스러우나 하나씩 분리해서 보면 생명의 환희에 대한 대단한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며, 부활한 생명이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이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기쁨을 충족시키는 현실적인 존재임을 알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작가는 나체의 정신에 대한 확고한 경지를 보였다는데 탁월성이 있다.
교회가 금욕과 영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육체적인 모든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은폐하고 억압하면서, 육체는 자연스럽게 죄와 깊이 연관되는 조심스러운 것으로 정립되고 육체적인 모든 것을 멀리 하는 것이 영적 삶의 기본이라는 이상한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정착되었다.
이것은 비성서적인 것이기에 그 부작용은 참으로 대단했으며, 오늘도 우리 크리스챤들은 과거 보다는 낫지만 아직 하느님의 선물인 육체에 대한 비 복음적인 올가미에 묶여 살아가고 있기에 육체에 대해 어색하고 미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육체는 죄의 근원이요 성(性)과 관능(官能)을 연결시키는 처지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오늘 우리들 보다 더 까마득한 과거에 인간 육체를 하느님의 걸작품으로 소개하면서 육체적인 모든 표현을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감사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과감한 예언성을 보이고 있다.
영적인 삶에 몰두하는 사람일 수록 육체는 끈끈함, 어두움, 여름을 연상시킨다면 이 작가는 육체를 부활한 생명, 경쾌함, 봄과 같은 주제로 접근시킴으로 행복한 삶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주고 있다. 이 작품을 보노라면 초세기 교부이신 성 이레네오의 말씀이 생각난다
< 살아 있는 인간이야 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다.: Homo vivens, gloria Dei ! >